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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SE JUN

 The way to understand the world

 
 
 
 
 

NEWS

Solo shows, group shows, art fairs and other exhibi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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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O SHOW <SPACE OPERA>

KSD 갤러리, 서울, 한국 07.01~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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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
<POST APOCALYPSE>

So, One, 서울, 한국 09.10~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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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 SHOW
<HERE WE ARE>

2025년 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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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 SHOW
<신소장품전 + NEW ACQUISTIONS+>

2025년 1월 1일

Group show<사자울_사자가 가죽을 남기는 방법>

GROUP SHOW
<사자울_사자가 가죽을 남기는 방법>
<SAJAUL: THE HOWLING OF HEROS' AND THE REMENANT SKINS>

2025년 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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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OLO SHOW

<표면의 풍경 LANDSCAPE OF SURFACE> 

July 12,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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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 SHOW
<SCENOGRAPHIC IMAGINATION>

2025년 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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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O SHOW
<세계관 WELTANSCHAUUNG>

2025년 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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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TALK<세계관 WELTANSCHAUUNG>

2025년 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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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 SHOW
<NO LIFE KING>

2025년 1월 1일

 

TEXTS

articles, artist notes and press

보글보글 끓는 편지/글

글: 권태현


친애하는 이세준 작가에게


안녕하세요. 권태현입니다. 난지 스튜디오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는 날씨가 이렇게 차갑지 않았는데, 벌써 겨울이 코앞이네요. 지금 창밖에는 깃털을 채워 넣은 외투를 입은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총천연색으로 꿈틀거리는 사람들, 바람에 살랑거리는 은행나무, 기하학적으로 솟아오른 건물들, 여기에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한 하늘에 펼쳐지는 추상적인 공간까지 하나의 화면에 보이네요. 그림에 겹쳐있는 전혀 다른 시점과 형식들, 그리고 인위적인 색채에 대한 질문에, 세계가 원래 그렇게 생기지 않았냐고 답하는 작가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갑자기 안부를 물으려니 괜히 민망하여 서두가 길어졌네요. 그간 잘 지내고 계셨나요?


저번 만남 이후로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곱씹고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다양한 이야기들이 오고 갔죠.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관념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가장 작은 붓질부터 저 멀리 우주에 대한 이해까지. 이상하게 극단을 오가는 이야기 나누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특히 신흥 종교 라엘리안 무브먼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사실 신흥 종교 리서치는 저에게 은밀한 취미 같은 것이었는데, 다른 사람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본 경험은 거의 없었거든요.) 스튜디오에서 이야기를 나누니 대화와 작업들이 겹쳐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상황은 종종 경험해 보았지만, 누군가 하는 말들과 그가 만들어낸 것이 이토록 잘 통하는 사람은 드물다고 생각했어요. 말과 그림의 내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들이 한데 모여있는 형상의 문제랄까요. 그래서 글도 그런 모습을 따라가 보려고 합니다. 이 텍스트는 이렇게 편지로 시작하지만, 끝까지 편지로 읽힐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일련의 이야기는 아마 세계관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작가님의 이전 개인전 제목이었죠. 여러 사람들에게 세계관에 대한 설문을 받고, 그 답변을 바탕으로 작업을 하셨다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저는 세계관(world view, Weltanschauung)의 ‘관’, 영어의 ‘view’, 독일어의 ‘Anschauung’이 모두 응시, 관찰, 직관 등 본다는 의미를 지녔다는 것을 생각했어요. 우리는 같은 세계에 공존하고 있는 것 같지만, 세계를 어떻게 ‘보고’ 있느냐에 따라서 각기 다른 세계를 살고 있을 수도 있겠죠. 세계를 보는 문제가 세계를 구성할 수 있다는 점은, 이러한 주제가 그림으로 다루어야 하는 이유가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작가님의 그림에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봐야 하는 형식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습니다. 풍경으로부터 추상으로 가거나, 해부학적 일러스트를 바탕으로 전혀 다른 형상이 겹쳐지는 것처럼 말이죠. 그것들은 존재의 다름이 아니라, 보는 방법의 다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창밖을 보는 눈과 지도를 보는 눈 만큼의 차이랄까요.


사학자 마틴 제이는 「모더니티의 시각 체제들」이라는 글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원근법과 바로크의 시각성, 그리고 17세기 네덜란드의 시각성에서 보이는 분열을 통해, 우리가 단일하고 지배적이라고 여겨왔던 서양의 원근법 체제가 애초에 지니고 있던 분열을 짚어낸다. 모더니티의 시각성은 여러 가지 이론과 실천이 조화롭게 통합되어 지배적인 하나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고 그 안에서도 수많은 시각 체제들 사이의 경쟁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의 원근법, 다시 말해 알베르티적 원근법주의는 자연스럽고 과학적이며 기하학적으로 세계의 모습을 포착한다고 알려져 왔다. 그것은 근대적 사유, 그러니까 데카르트적 주체와 연결되는 헤게모니적 시각성이기도 하다. 그러한 원근법은 화면 안에 총체적으로 구성되는 서사를 가지며, 프레임 뒤쪽으로 확장성을 가지고 세계를 담아내는 창문의 모델이다. 그에 비하여 베르메르를 비롯한 네덜란드의 회화는 화면이 총체적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제각각 독립적인 의미를 가지고 작동하는 지도에 비견할 수 있다. 지도는 그 뒤로 더 뻗어 나갈 수 없는 평평한 표면이고 이미지뿐만 아니라 텍스트 등을 포함하며, 전체 구성에서 작동하기보다는 제각각 읽힌다. 각각의 그림은 창밖을 보는 것과 지도를 보는 것만큼의 전혀 다른 보는 방법과 연결된다. 훑어보는 것과 응시하는 것, 이성적인 보기와 욕망하는 보기 등 어떤 것이 헤게모니를 잡는 순간은 있지만, 하나의 원근법 체제 안에서도 보는 법들은 항상 투쟁하고 있다. 나아가, 하나의 원근법 체제가 아니라 동아시아의 시각적 체제와 같이 아예 다른 방식의 시각성이 함께 작동한다면?


제가 스튜디오에서 발견한 미완성의 그림을 보고, 섞여서는 안 되는 것들이 섞여서 이상한 화학반응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더니, 작가님이 “마녀의 수프”라고 하셨던 것이 떠오릅니다.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것 같다고. 현실에서는 아무리 다른 물질들을 섞어 놓아도 잠깐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고, 곧 시간이 지나면 엔트로피는 평형을 상태를 이루게 되지요. 어떤 경우에는 다른 것들이 화학적으로 섞여 하나의 물질이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작가님의 그림에서는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쉼 없이 끓어오르는 힘이 계속해서 느껴집니다. 멈춰 있기에 오히려 더 움직인다고 해야 할까요. 가장 폭발적인 반응이 일어나는 이질적인 것들의 만남 상태를 유지하려고 하는 듯합니다. 회화라는 매체 가질 수 있는 힘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기도 하네요. 이참에 저도 그런 수프를 한번 끓여보는 중입니다. 물론 이미지가 할 수 있는 것처럼 폭발적인 힘이 느껴지지는 않을 수 있으나, 텍스트는 그 나름의 오묘한 맛이 있으니까요. 마녀의 수프는 달콤하게 넘어가며 몸을 있는 그대로 건강하게 만들기보다는, 쉽게 먹을 수 없는 마법적으로 변용되는 순간을 만들어내잖아요. 특히 몸의 크기 등, 스케일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많다는 것은 생각해볼 만합니다.


질 들뢰즈는 스피노자에 대한 강연에서 그 철학자의 개념어에 대한 프랑스어 번역 문제를 먼저 꼬집는다. 스피노자의 아펙티오(affectio)와 아펙투스(affectus)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아펙시옹(affecion)으로 번역하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아펙티오는 아펙시옹으로, 아펙투스는 아펙트(affect)로 옮겨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어에서 아펙티오는 보통 ‘변용’이라고 번역하고, 아펙투스는 ‘정동’을 주로 쓰지만, ‘정서’, ‘감응’, ‘감정’ 등의 번역어가 혼재되어 있다.


“나는 감정을 신체의 변용으로 이해하는데, 이 변용을 통해서 신체의 행위 능력은 증가하거나 감소하고, 도움을 받거나 방해받는다.” “우리가 정념이라고 부르는 감정은 혼동된 관념으로서, 그것을 통해 정신은 자신의 신체가 이전에 비해서 갖는 더 크거나 더 적은 존재의 힘을 긍정한다.” “내가 이전보다 더 큰 혹은 더 적은 존재의 힘을 말할 때, 내가 의미하는 것은, 정신이 신체의 현재 상태와 과거 상태를 비교한다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형식을 구성하는 관념이 신체에 대해 실제로 이전보다 더 큰 혹은 더 적은 실재성을 포함하고 있는 어떤 것을 긍정한다는 것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스피노자, 『에티카』, 질 들뢰즈, 『스피노자의 철학』, 민음사, 2001, pp.76-81. 에서 재인용)


여러 개의 캔버스로 이루어진 작업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그중 하나를 빼내어 보아도 그대로 작동하는 독립적인 작업이 될 수 있냐고 물었는데, 당연하다고 말씀하셨죠. 부분과 전체의 문제는 항상 흥미로운 주제가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화면 안과 바깥에서 동시에 작동한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여기서 부분은 또 다른 스케일에서 보았을 때, 또 다른 부분들의 전체이고, 그 전체는 다시 부분이 되는. 그런 감각은 어떤 이미지도, 어떤 물질도 어떠한 다른 조형의 수단으로 환원되지 못하도록 합니다. 지금 보고 있는 스케일에서 나름의 자율성을 가지고 작동하는 형상이 되지요.


“130년 전 멸종한 줄 알았던 전설 속 ‘요정새’가 코로나로 사람들 뜸해지자 다시 돌아왔다” (『더 에포크 타임즈』, 2020년 8월 18일.)


화면에 나타나는 추상적인 부분에 대한 이야기도 한참을 나누었습니다. 대화는 구글 어스나 구글 마스에 대한 것으로 번져나갔고, 가상적 이동뿐만 아니라 극단적인 확대와 축소가 가능한 인터페이스와 그것에서 가능해지는 추상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죠. 관념적인 추상이 아니라, 구상의 극단에서 포착되는 추상적인 면이랄까요.


폴 비릴리오는 속도가 세계의 형태를 어떻게 바꾸는지를 이야기한다. 속도가 사물의 출현 가능성이나 형식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속도 중에서도 경쟁적으로 계속 빨라지는 질주의 문제를 다루며 그는 자신의 논의에 ‘질주학'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특히 그러한 가속화가 회화와 영상, 조각 등에서 추상화를 초래했다는 주장은 흥미롭다. 이제 속도는 신체적인 것과 광학적인 것을 넘어 인터넷을 타고 움직인다. 가상의 현전은 더욱더 부추겨지고, 공간을 바탕으로 체화된 경험은 점점 더 축소되고 있다. 비릴리오는 테크놀로지의 가속화가 우리의 지각작용이 가 닿을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서 ‘소멸’로 질주해버렸다고 말한다. 세계가 실제의 크기에서 벗어나 극단적인 초소형화와 초대형화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님의 그림들은 여전히 부글부글 잘 끓고 있나요? 이 글에도 더 이상한 것들을 몇 스푼 더 넣고 싶지만, 곧 냄비가 넘쳐버릴 것 같습니다. 이상한 수프를 끓이는 게 쉬운 일이 아니네요. 작가님과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한 스푼씩 넣을 때마다 올라오는 냄새가 오묘하게 바뀌는 것이 참 신기했습니다. 취하는 것 같기도하고. 어딘가에서 이미 마법이 일어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또 만나 뵙고 싶습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각자 더 많은 세계를 통과하여 다시 만날 수 있길 바라며.


권태현 드림

통조림, 데우스엑스마키나, 이세준


우아름 미술비평

★ 통조림

이세준의 그림을 바라보고 있자면 통조림이 떠오른다. 통조림을 만들기 위해서는 과일을 끓여서 그 안에 있는 것들을 모두 잠재우고, 설탕과 과일의 산 덕분에 미생물이 활동할 수 없게 되면 끓는 물로 소독한 유리병에 담아 뚜껑으로 닫아 둔다. 내용물이 식으면서 진공 상태가 되면 그 속에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유리병 통조림은 시간을 고정한 캡슐이 된다. 이세준의 그림도 그렇다. 세계를 이해하고자 매일 상상하는 이세준에게 한 편 한 편의 그림은 그날의 상상을 보관해주는 통조림과 같은 게 아닐까. 이세준은 이 상상의 조각들을 캔버스라는 유리병에 차곡차곡 넣고 바니시를 발라 소독해서 진공 포장해 둔다. 그리고 이 통조림을 하나씩 꺼내어 전시장에 두었다.


◁ 데우스 엑스 마키나

고대 그리스에서 기계장치의 신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는 평론가들에게 미움받았다. 그가 이야기의 외부에서 내부를 향해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극작가가 극을 끌고 가다가 위기에 처한 주인공을 구해줘야 할 때, 극을 어떻게든 이끌고 나가야 할 때마다 그가 효험을 발휘했다. 덕분에 이야기는 어떻게든 이어질 수 있었지만, 이야기의 내부는 내적인 개연성의 결여로 성기게 마련이었다.


이세준은 그동안 그림 속에 다양한 도상들을 버무려냈다. 그의 그림 안에서는 언제나 많은 도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누군가 방금 빠져나온 것 같은 순간을 그린 장면도 있었다. 어떤 도상들이 합쳐져 한 세계의 장면이 되고 어떤 순간이 떨어져 나와 하나의 장면이 될까? 초창기 그의 그림에서는 그가 인식하는 세상의 조각들이 도상으로 변환돼 하나의 화폭 안에 열거되는 방식으로 화폭을 채웠다. 마치 뇌가 인식하는 외부 세계를 손이 받아 그리듯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그렸기 때문에 별다른 인접의 논리가 없다. 낡은 보트 옆에 도라에몽이, 수풀 속에 버려진 인형 얼굴이, 공사 안내 패널 옆에 텔레토비가, 시든 화분 옆에 컴퓨터가 있는 식이다. 그 왁자지껄한 세계를 채우고 있는 각각의 도상들은 그가 인식한 세계의 조각이었고, 이세준은 그 도상들을 한 화폭에 채워 넣기 위해 그림 속 세상에서 기계장치의 신을 자처한 것처럼 보였다. 그 신은 일정한 시기의 그림 속에 같은 표식을 넣어 어떤 이야기와 또 다른 이야기를, 이 세계와 저 세계를 같은 시간대로 이어주기도 하고, 이야기를 그림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작가가 스스로 수행해야 할 선택의 가이드를 마련하기도 했다. 그렇게 그림 속의 도상을 연결하던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이번 전시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그림 속에서 빠져나와 전시 공간으로 걸어 나왔다. 이제는 그림과 그림 사이를 이어 이야기의 공간을 열어주겠다는 듯이. 그는 먼저 우리를 불기둥 앞으로 데리고 간다.


♂ 스페이스 오페라

전시장에 들어가기 전 로비 오른편에 거대한 불 그림이 있다. 모든 것을 태워 삼킬 것 같은 이 거대한 불기둥에서 이번 여정이 시작된다.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불은 소멸과 재생, 죽음과 탄생을 동시에 껴안은 존재다. 2015년경 작가의 작업실에 화재가 난 이후로 그의 그림 속에는 불에 탄 자국이 종종 들어오곤 했다. 그림 속으로 들어온 불은 그간의 그림 속 왁자지껄한 세계를 잠재워 정리하는 계기가 됐다. 그림 속 풍경은 과연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리고 불기둥 옆으로 불티가 된 색 점들은 어디로 튀어 무엇이 되고 있을까? 전시장으로 입장해서 확인해 볼 일이다.

전시장으로 입장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작품 <폭풍우 속에서 추는 춤>과 <최대한 가깝게, 그러나 불타지 않을 정도로만>은 하나의 세계가 태어나기 전의 폭발의 장면처럼 보인다. 우주공간처럼 보이는 검은 배경 위로 다양한 색상들이 향연을 벌인다. 스프레이로 뿌리고, 나이프로 문지르고, 물감의 마띠에르를 얹고, 붓을 짓눌러 거칠게 칠한 듯한 다양한 칠하기와 긋기의 몸짓이 그대로 그림이 됐다. 이 장면들 속에 나오는 색들은 이번 전시 작품 전반에서 계속해서 사용된다.

<노을을 조각하는 시간>에서 노을을 등지고 앉아 무언가를 조각하는 남자를 보면서 우리는 조물주가 제 자신이 창조하는 세상에 등장해버린 장면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이 남자는 작가 이세준일까? 그림 안과 밖을 넘나들면서 그가 펼쳐낼 다양한 풍경들은 <다른 세계에서 우리..>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다성적인 세계관 속에 공존할 것이다. 이 다성적인 세계는 <신세계에서>와 <어항의 보글거림>에서 서로를 반사하는 빛점과 거품 속에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고, <폭풍의 안과 밖> 그림 속 남자의 꿈속이나, 혹은 <밤은 세상을 감추지만 우주를 꺼낸다> 그림 속 쓰러진 나무의 가지를 들추면 거기에서 눈을 끔벅이고 있을지 모른다.

낮과 밤의 시간을 지나 도착한 도색한 벽면에는 저녁 노을 빛이 품은 수많은 색의 레이어를 기반 삼아 작가가 그려낸 작은 소품들이 걸려있다. 이 소품들은 노을 빛에서 태어난 행성이 밤하늘에 박힌 듯 배치되어 그 어느 곳보다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전시 명에 어울리는 벽면을 이룬다. 태초의 폭발과 낮과 밤, 폭발하는 우주의 벽면을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을 잃은 표정의 세일러문 우사기의 얼굴을 마주한다. 그 얼굴은 우리에게 이곳에서 본 모든 것을 잊으라고 말하는 것 같다.


☎ 남은 이야기와 불펜의 그림들

그렸으나 걸리지 못한 그림들이 불펜(bull pen)에 있다. 미처 담기지 못한 이야기들과 함께 그 불펜에 자리하는 그림들을 여기 언급해두려 한다. 외로움에 관한 이야기다.

불펜에는 전시작과 짝을 이루는 작품들이 몇 점 있다. 먼저 전시작 중 <신세계에서>는 추운 겨울에 그린 여름 물가의 풍경이다. 걸리지 못한 불펜의 그림 중 한겨울 설원을 배경으로 여름 해수욕장에서나 볼법한 수상 구조대 망루가 자리한 <압도적인 우주적 외로움>이 있다. 이 그림은 더운 여름에 그린 겨울의 풍경이다. 두 그림은 서늘한 더위와 따뜻한 추위로 대비되면서, 어떤 다르게 가능한 세계의 온도와 날씨를 어루만진다. 나에게 <압도적인 우주적 외로움>은 이 전시의 시작점이 된 <불>과 더불어 전시장에 존재하는 다성적 세계관의 세계로 입장하고 빠져나갈 입구 혹은 출구로 보인다. 걸리지 못한 그림이 전시장에 보내는 메시지는, 이것들이 모두 압도적인 외로움에서 건져 올린 풍경이라는 전언이다.

한편 전시된 작품 <지도>와 짝을 이루는 작품 <오파츠>도 있다. 각각 여성과 남성의 인체 생식기 측면도를 그린 이 작품들은 제목으로 인해 정체를 알 수 없는 유물과 지도로 치환되면서 서로 만나지 못할 것을 암시한다. <압도적인 우주적 외로움>과 <신세계에서>가 일군 외로움이 여기에서 완성된다.


☞ 외로운 세계에서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 말하고, 파악할 수 없는 세계를 포착해 그리기 위해서 어떤 기술이 필요할까. 우리가 묘사하고자 하는 것의 경계와 수량을 헤아리지 못할 때 우리는 목록을 만들곤 한다. 목록은 어떤 것에 대해 말하고 이해하기 위해 만드는 속성들의 열람표다.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목록을 만들고 나면, 우리는 이 세계의 끝없음과 불가지 앞에서도 안도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무한한 세계 앞에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장치다.

이세준의 그림은 세계를 파악하고자 목록의 시기를 지나왔다.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그의 열망은 도상을 빼곡하게 채워 넣어 왁자지껄한 장면으로 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세계를 파악하고자 했던 불가능한 열망이었다. 그런데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여전히 그림 그리는 밤은 외롭고, 그 밤의 허기는 진하게 마련인데.

전시작 <세계관2>는 이 세계를 눈과 손에 잡히는 것으로 파악하고자 했던 지난날의 열망을 초탈한 작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거대한 수풀 더미 위와 아래에 육신과 해골이 조응하고 있다. 결국 삶과 죽음 사이에 거듭되는 순환의 고리 속에서 세상이 끊임없이 재생된다는 것, 그것이 그의 지금의 세계관인가 보다. 그는 지금 우사기의 눈을 하고 있을까. (2020)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

나는 세계의 구조를 반영한‘그리기의 형식’을 만드는 작업을 한다. 내 그림들은 모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예전부터 우주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던 나는 이 세계의 본질을 들여다보고 싶어서 천문학, 종교학, 생물학, 양자역학 등 세상의 근원을 연구하는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탐구하며, 그것들을 토대로 세계의 구조를 상상하고 시각적으로 표현하려 한다.


내가 지금까지 진행한 작업들은 크게 4가지의 시리즈로 분류할 수 있다.


① 2011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큰 그림 Big Picture>series는 하나의 그림에서 시작해서 계속 새로운 캔버스를 연결해가며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크기가 될 때까지 확장시켜 그리는 회화작업이다. 그림 안에서는 복잡한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며, 다양한 소재가 뒤섞여 펼쳐져 있다. 전시되는 공간에 따라 가변 설치된다.


② 2016년부터는 <장면수집 Scene Collecting>series를 진행했다. 이 작업은 일상의 풍경을 수집해서, 상상으로 사건과 이야기를 더해 기이한 네러티브를 가진 장면으로 연출하는 것이었다.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감정과 사건을 표현하려 했다.


③ 2017년부터 <세계관 모으기 Collection of World Views>를 진행했다. 여러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의 세계관을 인터뷰하고 그것을 이미지로 표현했다.


④ 2019년에는 <표면의 풍경 Landscape of Surface>series를 진행하고 있다. 구상회화 속에 추상적 표현을 넣거나, 반대로 추상회화를 구상적 그리기 방식으로 진행한다. 이 작업은 그리기의 대상과 그리는 방식에 대해 고민에서 시작한 작업으로, 추상화, 구상화, 혹은 풍경화나 정물화 인물화 등 그림을 나누고 구분하는 어떠한 카테고리에도 들어있지 않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목표이다.


나는 다양한 사건과 행위, 감각, 감정 그리고 온갖 형상들이 가득 차 쏟아지고 있는 이 ‘세계’의 어떤 일부분만이 아닌 전체를, 왜곡 없이 온전히 표현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작업에 임하고 있다. 그렇기에 추상과 구상, 재현과 표현, 혹은 이미지와 물질이라는 경계마저도 넘나드는 그림을 지향한다. 회화의 목적과 소재, 내용 그리고 형식적으로도 범주화되지 않는 그림을 보여주고 싶다.(2019)

LEE SE-JUN_ THE WAY TO UNDERSTAND THE WORLD

I'm working on creating a form of drawing that reflects the structure of the world.
All my paintings I've painted represent the world where we are living.
I have long wondered what our universe looks like. To look into the nature of this world, I've been studying a variety of subjects such as astronomy, religious studies, biology and quantum mechanics that explore the origin of the world.


My works can be classified with four different styles.


1. <Big Picture>series, which has been going on since 2011, is a painting process that starts with a single picture and new canvases are continuously connected next to it until they are stretched out of the range of vision. In the images, the complex events take place simultaneously, and different types of mixed materials are situated on it. They are flexibly installed according to the display space.


2. <Scene Collection>series has continued since 2016. This work creates the scenes with quirky narratives by collecting daily sceneries, and then adding imaginary events and stories on it. I tried to express various emotions and events crossing over the boundary between reality and hyper-reality.


3. Since 2017, I have processed <Collection of the World Views> series. I interviewed people from different fields about their world views and expressed it with images.


4. In 2019, I have been working <Landscape of Surface>series. As to the process, either abstraction is added on the representational paintings, or abstract elements are implemented in a representational way the other way around. This work began with a thought about the objects of painting and the way to draw, and its final goal is to create something that can not be classified with any categories such as abstract, figurines, landscape or still-life paintings.


I'm working with the goal of expressing the whole world, not just a part of it, where diverse events, actions, sensations, emotions and all kinds of figures are fully happening without any distortion. Therefore, I aim to create the paintings that invalidate the boundaries of images and substances and I want to show the paintings that can not be categorised by the purpose, materials and formats of them.

형광색의 칼로리와 회색지대

이민주(월간 퍼블릭아트 기자, 미술기획)

이세준의 회화는 고열량이다. 그의 이미지는 보는 이에게 시각적으로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게 만드는데, 원인은 색에 있다. 작업에 관해 서술한 글들을 톺아보면, 가장 특징적으로 꼽는 것 역시 색이다. 한 캔버스 안에 시각적으로 시끄러운 핑크, 빨강, 노랑이 서로 섞이지 못한 채 얹혀 있거나 분할된 직사각형 도형에 쨍한 색상 도표가 붙은 까닭이다. 이 채도 높은 색들의 이름은 형광(Fluorescence). 형광은 물질이 빛의 자극에 의해 발광하는 하나의 현상이며, 형광‘색’은 그 현상이 물질화된 상태다. 작가는 손에 쥘 수 없는 현상을 색이라는 물질로 잡아두고, 캔버스에 올라간 물질은 관람객의 눈을 금세 피로하게 한다. 오늘 우리는 밤에도 어둠을 찾을 수 없는 풍경에 살고 있다. 자연광보다 TV, 휴대폰 등 인공 광에 의지해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이 색은 익숙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이세준은 색이 불편하다는 피드백을 주로 들었다고 전했다. 수없이 자극적인 색과 이미지에 노출되는 우리에게 캔버스에 올라간 이 색들이 불편한 이유는 뭘까. 이는 아마도 회화라는 형식에 대한 고전적인 기대에 있을 것이다.
한편, 시각적 불편함으로부터 소모되는 에너지양과 대조적으로, 그의 화면에서 대상의 재현은 자주 부재한다. 사라진 재현적인 형상 앞의 관람객은 대상에 마땅히 투여할 에너지를 비축한다. 언뜻 추상화를 표방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의 작업은 회화의 전통적인 논쟁의 자장 안에서 출발하는데 이는 구상과 추상의 사이에서 두 가지 층위의 이미지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회화의 역사에서 이미지는 구상에서 추상으로, 추상에서 구상으로, 그리고 그 둘의 혼합을 일궈내며 발전했다. 특히 추상회화는 20세기 초반에 등장하기 시작해, 세계를 구성하는 대상의 형태 이면에서 본질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앞선 논의를 딛고서, 작가는 자주 ‘본질’에 대해 언급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작업이 구상적이거나 추상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이러한 태도는 그의 작업을 구상도 추상도 아닌 중간 위치, 회색지대(Grey zone)에 놓이게 한다. 구체적으로 이세준의 두 신작<삼천포로부터>(2019)과 <폭풍우 속에서 추는 춤>(2019)을 살펴보자.
<삼천포로부터>는 분명한 재현의 대상을 드러낸다. 캔버스의 풍경은 위 아래로 분할되어 횟집에서 볼 법한 생선의 덩어리 진 움직임을 담는다. 넓은 캔버스 위에 묘사된 생선의 이미지는 명확하게 구상적이다. 그러나 묘사의 대상은, 특히 미꾸라지의 운동성은 언뜻 물감의 움직임과 등치되어 보인다. 물감의 이동 경로가 고스란히 남아 덩어리로 뭉쳐진 재현적인 이미지는 자체적으로 추상적인 요소를 가시화한다. 반면, <폭풍우 속에서 추는 춤>은 뚜렷한 묘사 대상이 없이 붓질의 형광 움직임만 남아있다. 그러나 일견 추상적인 회화로 볼 수 있는 이 작업은 구상적인 특징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는 붓 터치를 얇게 둘러싼 흰 테두리에 근거를 둔다. 작가는 우연한 붓 터치에 테두리를 그리며 마치 스티커처럼 부착된 모양새를 연출한다. 구상의 추상화, 혹은 추상의 구상화를 시도하는 것 같은 실험은 형태가 드러나는 방식을 탐구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구상과 추상적인 이미지 사이에서 형광색이 보여주는 그의 욕망은 무채색이라 할 수 있다. 형광색이 전하는 모종의 정동보다 흰색과 검은색 양극단 사이의 회색지대에서, 색이 가리키는 대상의 형태와 테두리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 지대에서 이미지를 살필 때 ‘본질’에 가닿고자 하는 그의 욕망이 드러난다. 그는 색이 없음을 지목하는 색의 이름처럼, 없는 대상을, 실체를, 무언가를 자꾸만 찾는다. 하지만 본질을 찾는 유구한 역사적 실천이 그러했듯, 그는 스스로 행위의 실패와 불가능성을 전제한다. 따라서 그의 회화는 그 실패의 선명한 기록과 다름없다. 요컨대, 형광이라는 오늘의 인공 빛과 고전적인 회화의 형식이 얽힌 이미지는 보는 이에게 시각적 포만감을 유도한다. 하지만 동시에 저 스스로 회색지대를 확보하고, 우리는 그 자리에서 형광 색채가 지시하는 무채색 욕망을 확인할 수 있다.

이세준 개인전에 부쳐

김인선 (스페이스 윌링앤딜링 디렉터)


2019년 7월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에서의 이세준 개인전 〈세계관 Weltanschauung〉은 작가가 관객을 대상으로 2014년 부터 수집해온 개개인의 세계관에 대한 질문들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종교에 대한 믿음을 비롯하여 신의 존재 여부, 우주 및 지구 외 생명체에 대한 인식, 죽음과 사후세계, 초자연적 현상, 인공지능 등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인식 세계에 대한 관객 개인별 의견을 묻는 설문을 진행하였다. 이세준 작가가 현재의 인지 가능한 현상을 소재로 두면서 우리에게는 일상적이지 않은 색과 장면으로 캔버스를 채워 나가는 행위 또한 인지하지 못하는 어떤 것을 시각화 한다는 점에서 그가 묻는 질문에 대한 스스로의 답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종종 그의 작업을 매우 사실적 묘사라고 말하곤 한다. 이세준 작가에게 그가 주로 사용하는 화려한 색채에 대하여 질문하였을 때, 이 형광과 원색이 뒤섞인 화려한 색채가 그에게는 일상적으로 바라보는 색채라고 하였다. 2015년 전시에서 그는 토르 인형을 그려서 보여준 적이 있는데, 영화에 등장하는 토르 캐릭터의 모습이긴 하였지만 작가 특유의 변형되고 야광스러운 색채로 그려진 것 처럼 보였다. 너무 이세준 작가스러운 토르 아닌가요, 했더니 모바일폰으로 찍은 사진을 하나 내밀었다. 놀랍게도 그 사진은 그림에 그려진 바로 그대로의 모습과 색을 가진 조악한 토르 인형이었다. 그림은 그 사진 속 인형과 똑같은 묘사였다. 이는 그가 2016년도에 해외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기회에 6개월 정도 베이징에 머무르면서 본 인형이었다. 이번 전시의 그림들을 살펴보다 보면 조악하기 짝이 없는 세일러문이 그려져 있는 캔버스가 있는데 그것 역시 보이는 대로 그린 사실적 묘사임이 틀림없다. 그러고 보면 앞서 기술한 ‘우리에게 일상적이지 않은 색’이라는 표현을 철회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가 사용하는 색은 대다수의 회화 작가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 색일 뿐, 주변을 둘러보면 그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그의 눈에는 이 세상이 화려하게 보이는데 그에 비해 많은 회화 작가들의 색채가 오히려 세상의 장면에 필터 처리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혹은 나의 시각 구조가 남들과 다른 건가 반문해보곤 한다고 했다.
이번 전시 〈세계관 Weltanschauung〉을 위하여 연출된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의 벽면 하나가 다양한 크기의 캔버스들로 빈틈없이 메워졌다. 124개의 그림은 〈77억 가지 신의 이름〉이라는 타이틀로 하나의 회화 설치면을 이루었다. 이는 1967년도에 출간된 아서 클라크의 SF 소설 “90억 가지 신의 이름”에서 차용한 제목이다. 해당 숫자의 신의 이름을 모두 호명되는 순간 지구가 멸망한다는 내용의 이 소설은 작가에게 매우 인상적인 세계관을 남긴 듯하다. 작가는 이를 좀 더 확장하여 현재 지구상에 살고 있는
인구 수 만큼 각자의 세계가 있음을 가정하고 이에 대한 개별 세계를 엿보는 프로젝트를 계획하였다. 비록 모든 사람들을 인터뷰하기는 불가능하지만, 그는 그의 그림에서 전시 기간 중 관객이 제각각 답했던 내용을 기반으로 캔버스마다 해당 답변과 관련한 혹은 해당 답변에서 영감이 된 이미지를 그려나가기 시작하였다. 세계관에 대한 질문이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우리에게 비가시적 세계에 대한 상상을 요구하듯, 이세준 작가가 구현한 이미지는 현실과 비현실의 세계가 혼재된 양상이다. 일상의 모습의 구현으로 보이는 구상적 표현은 붓자국과 강렬한 색채만이 남은 추상적 표현들이 함께 하거나 점차 일그러지거나 혹은 알 수 없는 흔적만이 남겨지기도 하였다. 그것은 하나의 화면 속에서 형성된 여러 겹의 레이어이기도 하다. 특히 최근 완성한 회화 장면에는 스티커가 그려져 있거나 실재 스티커가 붙어있기도 한데, 이는 특정 장소로서 묘사된 평면 속 환영적 공간을 분리시키는 일종의 겹으로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와도 같은 역할을 한다. 그의 말을 인용하자면, “그림에 스티커가 붙어있는 것처럼 보이면서 동시에 그림 속에 등장하는 무언가에 붙은 것처럼 보이는, 다양한 다른 작업들의 느슨한 연결고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의 세계를 향한 질문은 또 다른 방법론으로도 구현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보여준 작품 〈악어와 함께, 2018, 80x100cm, 캔버스에 아크릴〉는 캔버스에 그린 후 자르기를 반복하여 겹겹이 붙여서 하나의 장면을 만든 작품이다. 각 레이어의 이미지를 따라 잘려진 모양은 레이어간의 간격을 두고 작품의 두께를 만들어내면서 밀도와 깊이감을 만들어냈다. 그는 이 작업이 새롭게 탐구하고자 하는 평면의 영역에 대한 또 다른 초기의 시도로 여기고 있다. 이전의 평면은 캔버스가 이어붙여지는 방식으로 넓게 확장해 나가는 영역을 보여주면서 화면 속에서 복잡한 이미지들의 혼재를 보여주었다면, 이러한 작업은 이미지 간, 레이어 간 상호 가려지는 동시에 서로가 드러날 수 있는 여지를 주면서 평면으로서 가지는 한계를 극복해보고자 하는 방법론을 취한다고 볼 수 있다.
이세준 작가가 탐구하고 있는 세계관의 영역은 언제나 변하고 있고 그 영역이 다양하며, 다분히 철학적이기도 하면서 매우 일상적인 사고에서 출발하기도 한다. 자신과 다른 이들이 보고 있는 세계에 눈을 돌려서 이해하거나 혹은 자신이 믿는 세계를 긍정하는 근거로 삼기도 하고 혹은 타인의 세계를 반박해보기도 하고 있다. 이쯤 되면 작가 자신의 세계관은 단지 다른 이의 세계관을 묘사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사적인 자리에서 그가 질문한 것들을 되물은 적이 있다. 그는 그가 질문하고 있는 신의 존재나 영혼의 존재 등을 믿지 않는다고 했다. 단지 그것이 현상으로서의 존재할 수 있다는 명확한 증거 혹은 실험의 결과로서 증명된다면 인정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는 많은 이들이 실재로 이러한 현상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실재한다고 믿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묻고 있다. 이러한 과정 역시 그가 찾는 명확한 증거를 찾는 행위일수도. 그리고 그의 물음에 대한 적절한 대답을 찾게 되면 그의 세계관은 또 다른 변화를 보여주게 되는 것일까?

이세준 <세계관> 아티스트 토크 녹취록

(패널_이동근 작가)

2019.05.25

스페이스 윌링앤딜링


김인선 (이하 ‘김’): 안녕하세요.이세준 작가님이 워낙 오랜만에 전시를 가지셨어요. 얼마만의 전시죠?

이세준 (이하 ‘이’) : 제가 2015년 에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에서<무엇을 불태울 것인가> 라는 타이틀로 전시를 했었고 햇수로 4년만에 다시 전시하는 거네요.

김: 그리고 이동근 작가께서 패널로 참여해주셨습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동근 작가님은 학생으로 처음 뵀었는데 그때 독특한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던게 기억납니다. 그때는 회화작가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다른 매체들도 사용하고 계시죠. 하이트 컬렉션의 기획전에 참여하셨을 때는 특정 여행에 대한 소재로 소설책을 따로 쓰시고 그에 파생하는 듯 한 회화적 설치작업을 보여주셨구요.

이동근 (이하 ‘근’): 네 그때 그 당시에는 조금 제가 작업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과도기적인 상태였어서 머릿속으로 어떤 세계관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나온 글이었어요. 그런데 주변에서 그게 마치 픽션, 소설처럼 느껴진다고들 하더군요. 다들 그렇게 이야기해서 그래 소설로 치자 이렇게 된 상황이었어요.

김: 네, 오늘은 이세준 작가의 이번 전시 <세계관>에 대해 함께 얘기해 주시기 위해 시간 내주셨습니다. 이세준 작가님께 우선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Weltanschauung>라는 단어로 제목 번역을 주셨어요. 생소한 단어 같은데 영어가 맞나요?

이: 그 제목이 영어이긴 한데, 독일어가 원래 원어입니다. 그런데 그 독일어의 원어를 영어권의 외래어처럼 그대로 사용하는 식의 단어인듯 해요. 발음은 저도 정확하진 않아요.

사실 영어로 World view 정도가 있긴 한데 이 단어는 제가 원하는 의미까지 내포하지는 않는듯 하여 찾은 단어입니다. ‘세계관’ 그 단어 자체보다는 우선 제가 의도하고자 한 세계관이라는 것이무엇인지 설명을 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보통은 ‘너 세계관이 뭐니?’라고 묻지는 않게 되요. 어떤 SF 소설이나 판타지 소설 혹은영화나 드라마에서 만들어진 컨텐츠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모습과 다를 때 이 세계관은 가령 마법이 있는 세계관이거나,드래곤이 존재하는세계관인거죠. 얼마전에 한참 인기리에 종영된 '왕좌의 게임'을 보면 거기에는 처음에는 중세시대처럼 나오다가 나중에는 마법도 있고 죽은 사람이 부활도 하고 용도 등장하잖아요? ‘세계관’이라는 것은 그런 식으로 특정 세계가 가지고 있는 정체성을 말하는 단어 같아요. 근데 ‘관’은 ‘볼 관(觀)’이잖아요? 그래서 제 생각에는 세게관을 말할 때 각자가 다 살면서 가지고 있고 세상을 보는 시점, 시선이라는 생각을 해요. 쭉 작업을 하면서 제 관심사는 저 자신의 세계관을 탐험하는 거였던것 같아요. 이게 뭘까? 하면서 내가 살고 있는 세계는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있고 어떻게 생겨났고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고 죽으면 어떻게 될까 이런 것들이죠. 답을 내릴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것들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그렸던 그림들도 하나의 그림에 계속 이어 붙여가며 그려나가고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커다란 풍경을 만드는 작업이었어요. 내가 직관적으로 이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부분은 어떤 큰 세계의 일부일 수 밖에 없으니까 내 그림도 일부만 바라보게 되는, 움직이면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그런 구도를 만들고 싶었구요. 그러다가 문득 다른 사람들의 세계관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한 거에요.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 때문에2014년부터 다른 사람의 세계관을 설문으로 받기 시작했어요.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세계를 쌓아 나가다 보니까 저랑 완전히 다르게 생각하는 것들도 있고 또 아주 비슷한 것들도 있서 그들이 가지는 세계관의재미있는 요소들을 그림으로 그려보고자 모았던 그림들로 이번에 전시를 하게 된거구요.

김: 작가가 자신만의 스타일을 꾸준히 표출을 하는데 몰두하는 것도 힘든 작업인 것 같은데, 다른 사람의 생각을 모아서 또 그 개개인의 것들을 또 하나하나 표현한다는 것이 힘들지 않았나요?

이: 그렇다고 제가 절대로 그들의 세계를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 어긋나는 간극에서 나오는 것들을 보여줄 수 밖에 없는 것 같거든요. 저는 그 그 사람이 될 수 없으니까 그 생각을 백프로 표현할 수는 없는 거고 제가 혼자 상상해보는 거겠죠. 저 사람이 이런 세계를 가지고 있대. 그러면 저만의 방식으로 다시 이런건가? 이런 식으로 재현하는 느낌으로 그림을 그렸어요. 거기에 대한 부담은 크게 없었던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다른 사람의 세계관이 레퍼런스가 되어서 저의 스타일로 그림이 그려지는 거였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부담감은 크게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근 :그리고 다른 타인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설문이나 대화를 통해 듣게 되면 일단 언어를 통해서 그 내용을 인지하게 되는 거고 언어로 인지하는 순간부터 듣는 사람의 주관성이 개입한다고 생각을 해요.그래서 이 과정은 어찌보면 소스를 체득하는 이의 자기 세계관을 확장시키는 방법론으로서의 베이스가 되는 것 같아요. 일반적으로 독해될만한 도상들이 오히려 이제 표현적이거나 이미지를 파괴한다던지 혹은녹아내리게 하거나 이 과정에서 있는 작가 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조금 더 주관을 드러낼 수 있는 캔버스가 되기 위한 대상들이었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래서 세계관이라는 단어를 이 작가는 어떤 위치에서 조망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도 있습니다. 사실 본다는건그 안에 들어가있는 느낌이 오히려 더 안들거든요. 세계관이라는 것을 세계관 자체를 밖에서 바라보고 있구나 그래서 이렇게 나온거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봤던 것 같아요. 대개는 구체적으로 명시할 수 있는 대상들이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세계관이라고 하는 순간 뭔가 자기가 관심이 있는 부분은 객관화하거나 대상화하거나 그런 지점으로부터 떨어진, 모호하게 있는 구조로서 인식하고 있는 것 같고요. 그리고 이를 수행해내는 몸은 어디에 있는 거지? 하는 의문이 들었는데 이런 것이 개인적으로 재밌고 궁금하기도 했어요. 다시 말해,일반적인 도상이나 독해 가능한 영역들 그런 것들이 그림에 드러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런 것들을 자기만의 감각으로 점철시키는 방법으로도 갈수  있잖아요?  근데 그런 지점이 어떤 언어로 대변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게 어떤 감각들과 행위들로 이루어져있는지 이야기하면 좀 더 쉬울 것 같기도 하고.

이: 우선 도상에 관한 이야기부터 할게요 작업을 보면 계속 반복하면서 나오는 도상들이 많이 있고 거기에 대해서 굉장히 많이 궁금해하세요. 봐주시는 분들이 왜 자꾸 해골이 나와? 자꾸 왜 고양이가 나와? 도마뱀은 뭐야? 저는 아까 이동근 작가님이 살짝 힌트를 준 걸수도 있는데 무언가를 그릴때 그려지는 무언가가 자기의 원래 기의를 잃어버리기를 원했던 것 같아요. 다른 공간에서의 개인전에서<포락지>라는 제목을 썼던 이유는,포락지가 원래 땅이었다가 물에 잠겨서 땅이 없어진 그런 땅을 포락지라고 한대요. 부동산 용어라기도 하고. 저는 재밌었던 부분이 소유권에 대한 부분이었는데 땅이 이세준의 땅 뭐 이동근의 땅, 이렇게 있을수 있다고 가정해보면, 댐을 지으면서 소멸이 되면 땅이 아니게 되면서 소유권이 없어져요. 그 전에 뭐 보상을 받거나 하겠죠? 그런 다음 다시 물이 다 빠지고 땅이 되더라도 소유권을 되찾아올 수가 없대요.

그래서 저는 소유권이라는 개념을 의미의 소유권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도상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들이 있다면이들을 한 번씩 물에 담궜다가 끄집어내서 의미의 소유권을 잃어버린 도상으로서만 존재하게 되는 그런 식으로 이용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때의 전시가 2016년 케이크갤러리에서의 전시였었죠. 그 때 수집했던 이미지들을 보여주는 방식자체가 그랬었어요. 해골을 그렸다 하면 해골이 원래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의미의 해골과는 또 다른 의미로, 메멘토모리같은 것이라기 보다는 그냥 조형적인 의미에서 얇고 들쭉날쭉한 의미들로 가득차있는 화면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게 제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제가 바라보는 위치가 어디있는지에 대한 문제랑도 조금은 붙어있는 질문 같아요. 모든 걸 객관화하지는 못하겠지요. ‘이 그림에서는 제가 의미를 뺏으니 그냥 보세요’라고 해도 당연히 보는 사람들이 어떻게든 의미랑 연관지어서 그 그림들을 해석하게 되겠지만 저는 좀 그런 부분들을 들쭉날쭉하게 하고 싶었어요 어떤 것들은 매우 무거운 의미를 갖고 있는 도상이 있고 어떤 것들은 정말 가볍게 존재하는 화면 안에서 표현방식자체도 비현실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어떤 부분은 굉장히 밀도가 높은 화면이 있고 또 어떤 부분은 얇거나 물감의 농도가 묽기도 하면서 비현실적인 화면을 만들고 싶었던 것 같아요.        

김: 그게 결과적으로 작가님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반영한다고 이해를 하면 되겠죠?

이: 네 제가 바라보는 세계모양을 그림을 그리는 형식으로 치환해서 그린다고 보면 그게 아주 기본적인 제 그림의 설명이 될 것 같아요.

김: 그런데 그렇게 단순하게 결론을 맺기에는 어떻게 보면 또 일반론적인 결론일 수 있을 것 같아요. 꼭 작가의 시선 뿐만 아니라누구든 그런 감각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고도 할 수 있지 않나요? 차별화 할 수 있는 부분을 생각해본다면 이세준 작가가 사용하는 색채에서작가다운 재미가 있는 것 같아요.

이: 저는 이번 작업을 준비하면서 제가 개입하여 인위적으로 뭔가를 만들어야된다는 생각을 많이 못했어요. 어떤 방식으로 그려야지 아니면 어떤 색깔을 써야지 이런 것들은 그 고민을 사실 더 했었어야할 수도 있는데 제가 할 수있는 것들을 하는 거거든요. 색깔이 화려하고 채도가 높고 이런 것들도 특별히 그렇게 의도했다기보다는 그냥 제게는 세상이 그렇게 보이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부분들이 만약에 어떤 저의 특징적인 부분이라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특징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사람들이 이 전시를 보면서 물음표가 많이 생길 것 같아요. 그림이다 이렇게 가볍게 보는 분들 보다는 대부분은 이게 무슨 의미지 생각을 하실 것 같고, 왜 벽을 가득 채웠지? 아니면 풍경에 대한 스케일이나 구도 등등에서도 궁금증이 많이 생길 수 있지 않을까요?

근: 궁금함이라기 보다는작가가 이렇게까지 했다는 것에 대해서 작가의 어떤 적극성? 그런 것들이 느껴지니까 이를 파악하고 싶어지는게 좀 있었던 것 같아요. 처음에 딱 올라오면서 보자마자 처음에 저 그림이 많은 벽을 보면서 느꼈던 것은 마치제삿상같다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거든요. 제삿상 위에서 보면 저런 느낌이 있었던 것 같아요. 아무래도 차례나 제사를 지내는 집이다 보니까 저게 테이블로 보이고 여기를 되게 꽉 채워서 진서를 하고 싶었던 마음이었겠구나 하는. 그리고나서 나머지 그림들을 보다보니까 좀 어두운 그림들 같은 경우엔 뭔가 송가같기도하고. 그렇다고 딱히 무섭다기보다는 이 사람이 어떤 분위기로 어떤 모티브로 이 작업이나 설치나 이런 것 들을 진행했을까 등의 것들을 관심있게 보는 편인데 그런 분위기가 이전과 좀 달라졌나? 이런 생각을 좀 했던 것 같아요. 그전에 케이크 갤러리에서의 전시도 그렇고 컬러이야기를 좀 하자면 처음엔 분명 의식하고 컬러를 고르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했었어요. 그래서 만약에 의식이 아니라면 작업 앞에서만큼은 조증상태를 유지하고 싶은 건가? 그렇다면은 우울도 있을 것 같은데 우울만큼은 그림 바깥에 두고 싶은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렇다고 뭐 질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아니고 그림 앞에서의 태도와 그림 밖 사람으로서의 태도, 감정상태나 그런 것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본 것 같고 지금 최근의 작업들을 보면 그 두 개가 섞여져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조랑 우울이랑 둘이 애매하게 수면 위에서 약간 엎치락 뒤치락하는 것 같은 느낌이 좀 들었어요. 대상에 작가가 조금 더 수동적으로 반응한다 정도의 생각을 했어요. 대상이 선정이 되면 그걸 나서서 개입하고 적극적으로 바꾸고 변질시키고 이런 것도 그 전에 것이 좀 더 강했던게 아닌가,. 지금은 조금 수동적인 상태로 자기가 뭔가를 기다리는 제스쳐를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어요. 

김: 다른 말로 바꾸면 예전보다 훨씬 더 구상화된 것 같은 느낌?

이: 오히려 저는 더 극단화되었다고 생각해요. 그림의 일부분은 되게 구상인 부분이 있는데 구상인 부분들은 더 구상화되고 더 재현,모방,일루젼 쪽으로 간다면은 나머지 부분들에서 추상적인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은 이전보다 더 추상화되어서 간극을 더 넓히고 싶었어요. 그 부분은 정확하게 의도된 걸로 봐도 됩니다.

김: 제가 왜 구상이라는 단어를 썼냐면추상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부분도 추상적 감정을 구체화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확실성을 가지고 있는 느낌이라서 그런 표현을 한 것 같네요.

이: 재현이라는 토대 안에 어떤 추상적인 것을 콕콕 박아두고 싶었어요. 제가 그 전에도 일종의 추상적 표현이 부분부분 나왔었는데 그게 덜 드러났다고 생각해요. 덜 드러났던 이유가 비교대상이 없는 거죠. 비교급인 구상적인게 없으니까 이게 추상처럼 보이지 않고 그래서 그거의 비교급인 구상을 두고 양극에서 서로가 부딪히면서 서로 잘 드러나게 해주게끔 만들어내고 싶었어요.

김: 훨씬 더 비교가 되니까?

이: 네 더 넓어지게끔

김: 설문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죠. 이동근 작가는 어떤 답을 했을까 좀 궁금한데요?

근: 기억이 잘 안나요. 왜냐하면 너무 길고 문항이 많아가지고.. 다들 그렇게 느꼈을지는 잘 모르겠는데 답이 정해져있는건가? 그런 생각도 살짝 들었어요.

김: 객관식이 좀 거슬리긴 했어요. 내가 답할 수 없는 항목들이 좀 있어서..

이: 거기에 이제 기타 대답으로 해서 쓸 수있는 폼이었는데 이게 제가 프린트로 뽑다보니까. 구글폼에서는 제가 기타에 따로 쓸 수있게 해놓았거든요. 그런 객관식 문항에 대답이 조금 미흡한거는 제가 생각할 수 있는걸로는 쓴다고 했어도 또 세계관이란 너무 넓은 부분이 있으니까 그런 것 같구요. 이 설문에 심히 불편함을 느끼는 분들도 계셨어요. 의외로 왜 자꾸 나에게 이런 궁금하지 않은 것을 물어봐? 하고 반문하시죠.

김: 그런데 답은 많이들 하셨던데요. 대답이 꽉꽉 차 있더라구요.

이: 마지막 문항에 ‘혹시 다 대답하는데 불편함이 있었느냐, 만약에 있었다면 어떤 점이 그랬느냐’, 이런 질문에‘내가 궁금하지도 않은 것을 자꾸 물어보고있다, 이런 게 세상살아가는데 하나도 도움이 안되는데 내가 왜 대답해야되는지 모르겠다, 흥미가 없는 질문들이다, 나한테 큰 이슈가 아니다’그런게많았구요. 실제로 형이상학적 질문이니까 답이 없는 거잖아요. 답이 있겠지만 답을 알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 질문을 놓았던 이유는 제가 그림을 그리면서 제가 계속 그게 큰 이슈들이었던 것 같아요. 이게 어떨까? 답을 못 얻었으니까. 궁금하고 앞으로도 계속 궁금해할것같고. 제가 좀 재밌었던거는 종교를 갖고 계시는 분들은 대답을 하시기가 좀 편했던 것 같아요. 종교가 패키지처럼 이미 세계관을 만들어서 제공하거든요.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고 그런 것들. 어떤 종교는 있어,없어 이렇게 되니까. 앞으로 죽으면 어떻게 될거야 그것도 종교에서 다 답을 주죠. 죽으면 어디로 가.  죽으면 환생해 등등 이렇게 다 답을 주는데 이런 대답을 하기 가장 어려운 사람들은 종교는 없지만 자기의 세계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에요. 약간 저도 그럴 수 있고요. 그런 사람들은 그 모든 대답들을 자기가 직접 찾아서 해야되는 거에요. 공부도 해보고 아님 이게 맞을까 저게 맞을까 살아봤더니 운명은 있는 것 같아, 만날 사람은 만나더라고 이렇게 경험적이고 귀납적으로 자기 세계관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들이 있었던거죠.

김: 제가 그래서 질문에 답하는 게 재미있었던것 같아요. 저도 종교는 없고 나만의 세계관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근: 저의 경우는 뭔가 질문들이 이제 평소에 제가 생각했던 것들이 많이 있어서 수고롭지는 않았고 조금 더 섬세한 질문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던 것 같긴 해요. 좀 더 디테일 같은 것.       

김: 질문은 점점 더 발전되어 나가고 있는 것 아니에요?

이: 원래는 질문이 아주 조금밖에 없었는데 질문이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죽으면 어떻게 될지 그 정도의 간단한 질문으로 출발하다가 나중에는 군더더기가붙었죠. AI에 대한 질문도 있고 귀신과 유령의 존재, 초능력에 대한 것. 제가 오컬트에 관한 것들도 인터뷰 하면서 그런 분야들도 궁금해지더라구요. 아니면 UFO라던지 외계인. 인간의 다른 지적 생명체를 우리가 만난적이 없으니까 또 그들을 만나면 우리가 어떤 식으로 생각이 바뀌게 될지. 기성종교는 어떻게 될지. 그런 것들이 점점 추가된 것 같아요.

이 질문지를 천주교 신부님이 대답해주신적이 있어요. 예전오픈스튜디오때 레지던시에오셨던 분인데 가시는 길에 제가 요청드려서처음에 가벼운 마음으로 척척척 진행 하시다가, UFO부분이라던지 환생 이런 부분에서 신부님이 믿고 있던 부분이 천주교 교리랑 좀 어긋나는 부분이 있는거에요. 저는 천주교 교리는 잘 모르지만. 신부님 이 부분은 성서에 따라서 안되는 거 아닌가요 여쭤봤더니 그런 것들은 본인도 자기 안에서 화해시키는 노력을 해야될 것 같다, 기도와 함께 이런 것 공부를 좀 더 해봐야될 것 같다 하시면서 자기 세계관이 확장되는 거죠. 그런 과정들이 저한테는 재미있는 부분이었던 것 같아요.

김: 작업자체가 작가가 독특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해요.

이: 저는 되게 보편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되게 보편적인 사람이고 저의 생각은 되게 스탠다드 한거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이동근 작가는 그냥 보기에도 되게 특별한 사람이잖아요. 

근: 말을 잘 골라서 하셔야돼요 (웃음)

이: 특별한 사람이고 굉장히 유니크한 느낌이 있고 말투나 사고방식이나 특이해요. 그런데 저는 거기에 비해서는 굉장히 커먼센스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제가 이런 것들을 고민하고 있다 말하니까 일부에서 어떤 사람들은 넌 진짜 이상해, 그런 생각을 왜 해? 라는 대답이 돌아왔을 때 되게 놀라는 거에요. 남들 다 하는 거 아니었어? 그런 생각. 그러면서 궁금해지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근: 진짜 이상한 사람이다.

김: 서로를매우 이상해하네요.

근: 자기가 본인을 보편적이라고 하는 이야기도 최근에는 듣기 힘든 것 같은데.

김: 저도 이세준 작가 처음 만났을 때 특이하다고 생각했던게, 예를 들어 약을 사면 그 빽빽한 약 성분 등이 적힌 설명서를 다 읽어본다고 하더라구요. 

이: 저처럼 꼼꼼하게 읽어보고 그 성분에서 뭐가 부딪히고 안되고 그런 것까지 보시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몸에 들어가는 거니까 어떤 식으로 작용을 하는지 궁금하지 않나요?

김: 의심이 많나?

이: 그래서 그럴거라는 생각을 지금도 어느정도 하고 있어요. 그런 분들도 분명 있을거에요. 제가 엄청 평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저는 저의 약간의 독특함이 있다고 생각하고 스스로가 조금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할때도 있어요. 근데 그런 내가 특별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도 보편적이라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제가 전체적으로 봤을때 보편적인 인물인거죠.

김: 네, 그럼 보편적이라 치고 회화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해보죠. 이동근 작가의 경우도 여러 매체를 하지만 제가 이동근 작가가 학생일 때 본 작업은페인팅인거였죠?

근: 저도 본인 작업을 회화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해요. 저는 그렇게까지 확실하게 장르를 생각하고 있지 않은 정도였는데 얼마전에 유학가있는 친구한테 그림을 그리지 않으니 기분이 어때? 뭐 이런식으로 연락이 왔어요.

김: 요즘은 무슨 작업하세요?

근: 요즘은 스프레이로 뿌리는 작업도 하고 의자도 만들고 이것저것 하고있긴한데 저는 결과적으로 평면 조형 정도로 보는 듯 합니다. 흔적을 보기에 적당한 매체라서 회화형식처럼 평면상태로 펴서 보여주는 방법론을 사용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 결과물을저는 흔적이 누적된 상태가 더 중요해서 오브제라고 생각을 해요. 그걸 아니까 그 친구같은 경우에도 이제 그림을 안그리니까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던거죠. 그 친구도 그림을 그리는게 지속하기가 너무 어렵고 힘들어서 저한테 그런 이야기를 한거에요. 그거를 계속 할까 말까에 대해서.

그래서 최근엔 회화가 뭐지? 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어요. 단순히 답 내리기 어려운 거지 하기에는 너무 가까운 친구여서 답을 하려고 하다가 회화라는 것이엄청난 개인성을 전제로 해야한다. 그리고 의미가 빨려 들어가서 블랙홀처럼 특이점 그 안을 볼 수 없는데 보고 싶은게 되야한다. 그게 적나라하게 보여지는 특이점 상태가. 블랙홀에 빨려들어갈때 빛나는 그 상태라는게 엄청 적나라하게 보여지는 근데 실체는 보이지 않는 그런 상태여야 하는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거기까지 가는 생각의 경로에 대해서는 지금 정리가 안되어있긴 한데 느낌으로 그랬어요. 그래서 내가 그걸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나보다. 피하고 있는 건 아닌데 안하고 있으니 하고는 싶지만 그런 복잡한 생각이 나한테큰 장벽일 수 있겠다. 그 어려움에 대한 성격이이거는 제 생각이니까평면으로 캔버스에 마무리를 짓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하고 있는 이게 회화라고 생각하는 지에 대해서 생각을 좀 듣고 싶었어요.  

김: 매체나 형식 이 차원을 더 넘어서.. 조각에는 해당이 안되나요?

근: 조각에도 해당이 되긴 하는데, 저는 그림이 재현이라는 것에 대한너무 오랫동안 가지고 있는 어떤 벽을 넘어야한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그것을 넘어서고 나서 단순히 추상으로 결론이 나는 것도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강력한 카테고리들이 있어서 그 벽을 넘어서고 나서 남아있는 그 부분이 순수하게 개인적인 상태가 되면 회화안에서 참으로 매력적인 결과물이라고 느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다른 장르,영상이라던지 조각도 회화랑 비슷한 것 같기는 한데 조각은 몸으로 느낀다는 단계가 저한테는 한 단계 더 있는 것 같아서 부담스럽지가 않더라고요. 그래서 조각의 경우는 그냥 즐길 수 있는데 회화는 그냥 즐기는 느낌이 아니어서 초-전투적인 제스쳐 아니면 완전히 사람이 그 안에 빠져들어있는 그런게 없으면 저는 회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어떻게 보면 아카이빙, 드로잉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김: 재밌는 발상을 하고 계신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 이동근 작가가 회화에 대하여 새롭게 접근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이해하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회화는 평면 조형을 말하는 거 잖아요. 거기에 더 깊은 뜻을 더 부과하고 어떤 개념적인 용어로서 개념으로서 회화라는 용어를 쓰니까 다른 사람한테 너희가 하고 있는게 회화냐 질문을 할 수 있는 것 같은데 그렇게 까지 심도있게 접근을 하면 제가 하고 있는 회화는 회화가 아닐지도 몰라요. 왜냐면 저는 이동근 작가의 언어 속에 회화라는 개념은 제가 아직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했기때문입니다. 저는 평면 조형을 하는 사람으로서 그림이 어떤 역할을 하기를 바라는 부분이 있어요. 그게 회화이거나 개념어로서의 개념 내린 회화에 잘 결부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회화라고 물어보면 그렇다고 대답하겠지요. 근데 또 그게 뭔지도 잘 모르겠어요. 그 개념 자체가 되게 직관적으로 나뉠 수밖에 없는 질문이라고 생각을 해요. 획을 하나 긋고 안긋고 이미지 하나를 쓰고 안 쓰고 재현을 하고 안하고의 문제는 아닌 것 같거든요. 그럼 결국은 직관적으로 대답할 수있는 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기형적인 규칙들을 만들어 세계를 온전하게 그려내기


1. 나는 내가 속한 이 세계에 대해서 완전하게 이해하기를 언제나 갈망해왔다. 우주란 무엇인지, 어떻게 생겨났는지, 이 경이로운 곳은 또 왜 어떠한 이유로 존재하는지! 이런 것들이 너무나 궁금했기 때문이다. 나는 겪어온 경험들을 토대로 의미를 반추해 보거나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두고 세상을 더욱 넓게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 의미 있는 것들의 목록을 작성하고, 마치 저장 강박증이 있는 사람처럼 강박적으로 지식을 모아 나갔다. 하지만 무엇을 완전히 알게 되었다는 믿음은 언제나 배반당하고 세상은 도무지 하나의 정의로 관통되지 않는다. 과연 이런 세계를 하나의 이미지로 표현해 내는 것은 가능한 것일까?


2. 단순화하자면 내 작업은 ‘세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가며, 그 과정을 시각화하는 것이다. 세계를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수집하고 그것들이 구성된 방식을 해석해서 작업의 구조를 세우는데, 세계의 모든 것들을 그림으로 표현하려는 실로 강박적이고 불가능한 목표를 쫓으면서 나는 몇 가지 문제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존재하는 수많은, 실은 무한한 요소 중에서 그림에 들어갈 소재를 선택하는 것이라든지, 그것들을 화면에 배치하고 구성하는 기준, 색의 선택, 어떤 기법으로 그릴지 같은 문제들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작업에 적용되는 규칙들을 여러 분야에서 가져오거나 만들고 그것을 이용해서 작업을 진행해 나가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규칙들이 작용되는 과정에서 결국 감각적이거나 우연적 요소들이 개입되며, 결국 작업은 설명 가능한 영역에서 설명 될 수 없는 영역으로 나아가는 아이러니를 보여주게 된다는 것이다.


3. 앞서 말한 형식적인 제약들은 내가 이해한 세계의 모습들(주관적 세계관)을 따라서 만들어진 것이다. 나는 수많은 기존의 이론들 중에서 내 작업에 적합한 논리들을 부분적으로 가져와서 적용시키고 설명하려는 시도를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작업 구조는 다양한 논리들이 조합되고 동시에 존재하면서도 각자 다른 기준으로 적용되는 모습이었고, 부분들의 합으로 존재하는 구조는 결국 필연적으로 비논리와 모순들로 가득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역설적이지만 나는 이러한 비논리적이고 모순적인 구조에서야 비로소 내가 인식한 세계의 구조와 맞닿은 지점이 있음을 발견한다.


4. 무한대로 다양한 소재들을 이용해서 화면을 구성하는 작업을 진행하면서, 저 스스로 생겨나는 네러티브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리고 작업을 진행해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논리-혹은 만들어진 논리 위에서 진행되는 작업의 경우처럼(관계의 역전) 작업 전개과정에 공상허언증적인 면이 있다. 한편으로는 많은 경우 관람자들이 그림을 자신의 경험에 대입해서 읽고 각자 다른 이야기를 상상하고 구성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작업을 진행하고 결과물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이야기와, 관람자가 작업을 보면서 스스로 만드는 이야기가 대입되고 상호작용하는 구조의 작업을 진행하려 계획 중이다.(2014)

CREATING DEFORMED RULES TO DEPICT THE WORLD PERFECT

1. I have been tempted to understand the world that I belong so eagerly. I mean the whole world as it stands. I’m interested in what the world is. How did it all start and why does it exist anyway! I have been trying to learn more and more about the world, experiencing, studying various fields, awaking myself to the significance of it. Listing up things that seem significant to the world, I have been accumulating knowledge as if I have compulsive hoarding syndrome. However when I get to the faith that I completely figured out what the world is at last, I got betrayed all the time. It has never been defined in one word. Is it impossible to present the world in an image, then?


2. To put it simply, the whole process of my work is about the questioning ‘what is the world?’ and answering it, visualizing it in my way. The work was built by collecting lots of components of the world and translating how they compose the world. I had to face several problems in this process of chasing a very much obsessive and almost unrealizable goal to present the whole world on canvas. Such as how I set the criteria of constructing them, what colours or themes I should choose, how I should place them, and which techniques to be applied here. I started by drawing a few different ideas and rules based on the various studies that I have kept on and sometimes created new ones that are considerably relevant to the goal. What so interesting here is the fact that accidental and sensuous components are inevitable when those rules were applied practically. As a result, the work shows us an irony that the area which is possible to explain are heading to the area which is not.


3. The formal constraints I mentioned before were made by a view of the world of mine(a subjective one). I gave a try to use lots of existing theories as far as I could borrow and applied them into my work. This way of a working process appears to be the picture that different logics are combined and coexist simultaneously, but still are applied with each of their criteria. In conclusion, a structure which is made with a sum of parts, necessarily packs a full of illogic and self contradiction. Then I have come to realize that the illogical and ironical structure is the one I was longing for. The structure of the world I recognized turns out at this point.


4. Placing various themes on the picture, I have noticed that the narrative comes into its own. And Some kind of pseudologia fantastica is found in this progress, in case of the logic is created on the progress-or in case of the progress on the structured logic(reversal of position). On the other hand, I have found that the spectators of the picture generally made different stories by own experiences, imagined and constructed the themes themselves. I’m accordingly planning for the work that the story which is created in the progress, interacts with the one which spectators make, while they appreciate the picture.


Exploring the unsettled world : criticism of Se-jun Lee’s work at the Yang-ju municipal creating art studio, written by Seung-ho Shin (Director of Perigee gallery)

21st century is passing uncertain days more than ever. There aren’t any clear ideologies guiding the publics or any other religious truth that people can trust strongly. It is not a single ideology that changes the world, now several ideologies are spread around the world. It seems that we respect others or stay in peace and enjoy freedom together, but the world are struggling against the chaos. Showing respect and a sympathy, people don’t choose which side they are on, so that the unproductive and complicated situations are made. And it seems like the situation repeats again and again. The scholars have kept studying on this world in various fields. Of course there is one that becomes an ideology which leads the world, but also there are the others that disappears, not being the mainstream. Despite all these studies, the world we live seems not comprehensible. It seems that the nature on this planet are tangled so complicated, just as it was born with incomprehensibility, a mystery. In the process of the human history, Se-Jun Lee pays attention to everything which is originated from the natural cause.

As now look for the Lee’s work, his painting has a sophisticated structure. In the picture, there are plenty of things going on. Diverse plants and animals, parts of human bodies, smoke of something, building materials or industrial products that are thrown out. Various of splendid colours look organic view, appearing to be the universe. The work tends to be a kind of surrealism which has a factor of an abstract painting. And an each piece of the pictures, takes on the roles as an individual work, not only being all together as one. Let’s follow what Lee says about his own work. He tries plenty of things on the work, as I could see in the picture. Images in the picture are based on his own experiences and memories. He tended to show situations or conditions, not to focus on reviving a detailed image, eliminating an identity of objects. Moreover, in order to represent the objects of each images on the canvas efficiently, he dissolved perspective, used various contrasts of colours and objects(such as complementary contrast), brushing thin textures, flowing and spraying. And also Lee seeks after a picture that can not be figured out at a look and a picture that the part and the whole is blended so that the every boundary gets collapsed. Therefore, Lee’s work could be displayed in variable structures at exhibition halls. The work seems so spontaneous, intuitive and unrestrained, yet it is a calculated effect that he intended to.

Interviewing Lee, I asked two things. First, a question about his view of the world. He says that the world is not comprehensible, judged by himself. And so it led him to choose the complicated way of works to understand the essence of the world as far as he could. He believes that the world is all connected. And the world has never been a simple structure so it’s impossible to realize it in a single image. Thus he pays attention to the diverse points of view which are hid under the structure. When you find out how they are hidden and linked under the structure, you could get near to the essence of the world, he says. He also uses various methods in order to avoid an established way of painting by collecting all the techniques of established painting. Here’s the second point I had to ask. He did not use any different medium except painting. I asked what if he had used other various mediums. It might have been more effective to represent his design. In fact, painting on canvas is restrictive as itself. Yet putting something on a canvas, the two dimensional level transforms to a universe that abstractly transcends time and space. It means that connotative meaning of inner time and space matters more here. I can tell you that painting itself forms a single idea firmly and as a matter of fact, it is apposed to his view of the world he’s chasing. Ironically, every natural object and artificial thing in the picture is all connected to his theories or points of view and could not be one sided at the same time. As his goal was to put ‘diversity and complementariness of the world’, he needed the contrast of the design and of the way of presenting also, so as to achieve his goal.

Lee premised that the goal of his work was impossible to achieve, yet was full of aspiration to find out the causation and the algorithm of the world. This attitude seemed to keep him sincere on the goal. As you know, when the two saw a case, it is rare that one and another remember it in the same way. People see and understand things individually, sometimes see another when they are in a group and moreover, artists see others with aesthetic sense. What Lee is interested in, is various things resulted by different subjects and generating complex diversities. The work that keeps increasing in the number of canvas, on the other hand, increases more stories when ‘other’ enjoys the picture and meets ‘I’ of the work. When the relationship continues between I and other, the work completes at last. Here’s an interesting point. When all the contrasts appear, they emphasis the world which is full of paradoxes. Although Lee knew his goal was impossible to achieve and the world was incomprehensible at the beginning, the work was progressed and patterns were made throughout the rule that he designed. At the end, the fact that he chose a medium which was painting only, disproves what he said, but also shows the direction that he tried to keep, on the contrary.

The world we live that Lee try to say, could be explained by complexity, diversity, simultaneous and plural characteristics. However the way he progresses on the work is logical, analytic and systematic. The society we belong practically has rules, is self-supporting and alive. The society has been producing chaos, restlessness and new orders, repeatedly dissolved over and over. Then, isn’t that the chaotic and paradoxical work is a step to create another new order and pattern of the world? I could tell that his work seems an precursor and a progress, because he tries to search and study various fields like philosophies, religions, astronomies, biologies and physics, but also applies them into the picture continuously. He spares no pains in recording, organizing and analyzing them, while discovering rules or patterns naturally. No one knows how they transform, how they appear in his work in the future. Yet we are seeing a progress of the world that are built with new rules and patterns by Lee, with our own eyes. I’m glad to wait and see how he progresses the work further. (2014)

불확실한 시대를 탐사(探査)하다 (양주시립 미술창작스튜디오 비평 워크샵_이세준 작품비평)

신승오(페리지갤러리 디렉터)

21세기는 그 어느 시대보다 불확실한 시대이다. 사회를 이끄는 명확한 이념과 우리가 굳건히 믿을 수 있는 종교적인 진리 또한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제는 단 하나의 이념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 이념들이 분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서로를 존중하고 평등하고 자유로운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 세상은 혼란함을 겪고 있다. 누구의 손도 들어줄 수 없는 서로에 대한 존중과 인정이 다양한 방향으로 뻗어나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도는 다람쥐 챗바퀴 돌리듯이 비생산적이며 복잡한 상황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학자들은 이러한 세상을 파악하기 위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를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다. 물론 세상을 이끌어 가는 세상의 이념이 되어 인정받는 연구도 있지만, 빛을 못보고 사라져간 수많은 비주류의 연구들이 존재한다. 어찌되었든 이러한 연구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세상은 파악하기 어렵다. 마치 지구라는 자연에서 살아가기 위해 만들어 가는 모든 것들은 복잡하게 이어져 있고 태생적으로 불가해성(不可解性)을 가지고 태어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인간의 역사가 진행되면서 지금까지 자연스럽게 발생하여 만들어지고 형성된 모든 것들이 이세준이 관심을 가지는 대상이다.

우선 이세준의 작업을 살펴보자. 이세준의 작업은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작품 속에는 다양한 식물들과 동물들, 그리고 인간의 신체와 뭔지 알 수 없는 연기들, 그리고 최근에는 주변에 버려진 건축자재나 공산품들을 그려낸다. 그리고 여러 가지 화려한 색들이 뒤섞여서 우주처럼 보이거나 유기체적인 움직임을 보여주기도 하면서 추상화 적인 요소들이 존재하면서도 초현실적인 작업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작품들은 서로 이어져 하나의 큰 작품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따로 떨어져 개별적인 작품으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먼저 작가가 이야기하는 자신의 작업 방식에 대해 알아보자.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작품에서 바로 느껴지듯이 다양한 요소들을 복잡하게 사용한다. 우선 등장하는 이미지들은 모두 자신이 경험한 것의 이억에 의존해서 그려내고, 그 하나의 이미지를 세밀하게 재현해 내기 보다는 상황이나 상태를 나타내고자 하며, 재현 대상이 없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노력한다. 또한 이러한 대상들을 재현하고 표현해내는 방식은 원근법의 해체와 색과 형태에 대한 보색대비로 나타나는 효과 그리고 물감의 질감을 얇게 해서 드러내거나 흘리고 뿌리는 기법을 사용한다. 뿐만 아니라 작가는 그리고 이러한 내용과 표현 기법 이외에도 한눈에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없는 그림, 부분과 전체가 뒤섞여 있는 그림, 따라서 모든 것의 경계가 모호한 상태를 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세준의 작업은 전시장에서 가변적인 구조를 가지는 작품들로 나타난다. 이러한 작가의 작품은 즉흥적이고, 직관적이며, 자유스러워 보이지만 그 안에는 논리정연하고 계산적인 작가의 의도를 충분히 담고 있는 자신이 만들어낸 질서를 그대로 드러낸다.

작가와 인터뷰를 하면서 궁금했던 점이 두 가지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그가 세상을 보는 관점이었다. 작가는 복잡한 세상에서 모든 것을 주체인 ‘나’가 혼자 판단하고 인지하는 것으로는 세상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복잡한 방식을 선택하는 이유는 자신이 살고 이는 이 세상의 본질을 이해하고 알아가며, 밝혀내려는 최대한의 범위까지 지속적으로 작품에 담아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세상은 모두 이어져 있고, 한번에 파악할 수 없는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 하나의 관점은 그 뒤에 숨겨져 연결되어 있는 다양한 관점들에 의해 이루어지므로 이것들의 연결구조를 파악할 때 진정한 본질에 다가 설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기존의 미술사에 등장하는 회화의 표현방식과 기법을 한 자리에 모아 놓아 표현하거나 기존에 사용되었던 회화의 재현의 틀을 벗어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한꺼번에 사용한다. 두 번째 궁금한 지점이 여기서 발생하는데 작가는 회화 이외에 다른 매체를 사용하고 있지 않은 점이 바로 그것이다. 작가의 논리를 담아낼 때 회화뿐만 아니라 다양한 미디움을 사용하면 효과적으로 표현해 낼 수 있을 것이란 의문이 든 것이다. 사실 회화의 캔버스는 그 자체로 한정된 공간이며, 그 안에 어떤 대상을 그려 넣음으로써 2차원의 평면의 공간은 관념적으로 시공간을 초월하는 하나의 우주로 변하게 된다. 이는 내면적인 시공간을 아우르는 함축적 의미를 지니는 요소가 강하며, 회화라는 매체는 그 자체로 이미 다분히 견고한 하나의 이데아를 형성하고 있다. 이는 작가가 추구하고 있는 기본적인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상반되는 지점이다. 아이러니하긴 하지만 작가가 이야기 하고 있는 세상의 모든 자연물과 인공적인 것, 그리고 이를 바라보고 찾아내는 이론과 관점들은 모두 이어져 있고, 어느 한편으로 치우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로서 ‘나는 세상에 나타나는 다양성과 서로의 상호보완적인 관계들을 담아내겠다’는 논리로 보자면 서로 상반되는 논리와 표현 방식 또한 내가 담아내야 할 대상인 것이다.

작가는 작업의 시작에서부터 불가능한 일이라는 전제를 두고 출발하고 있지만, 작업이 지속되는 과정은 세상의 인과관계와 그 알고리즘를 알아내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진실되고 사심 없는 관점을 유지하기 위함으로 보이는데, 사람은 잘 알고 있다시피 두 사람이 한 사건을 보더라고 동일한 방식으로 기억하는 일이 드물고 똑 같은 방식으로 기억하는 일은 더더욱 드물다. 우리는 개인으로 서로 다른 것들을 보고, 집단으로 서로 다른 것들을 보며, 그리고 작가들은 예술을 바탕으로 서로 다른 것들을 본다. 이처럼 이미 ‘나’라는 다양한 주체들에 의해 발생하는 다 분화된 여러 가지의 것들을 작가는 모두 관심을 가지고 탐구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증식해 나가는 작품들은 그것을 만들어 낸 주체인 ‘나’뿐만이 아니라 작품을 감상하게 되는 ‘타자’도 주체적으로 작품을 알아가는 관계들이 이어질 때 또 다른 이야기들로 증식해나가며, 작가의 작업은 비로소 완성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상반되는 것들이 나타나는 지점이 작가가 만들어 내는 파라독스로 가득 찬 세상에 방점이 되는 흥미로운 요소이다. 자신이 만들어낸 논리가 처음부터 불가능하며, 태생적으로 불가해한 카오스적인 세상임을 처음부터 인지하고 시작된 이 작업들은 작가가 만들어 내는 논리로 패턴화되어 가고 있다. 결국 풀어내는 매체가 회화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이 이러한 작가의 논지가 반박되는 증거인 동시에 그가 추구하는 작업의 방향을 그대로 보여주는 중요한 역할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세준이 말하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복잡성, 다양성, 무질서, 동시다발성 등 다양한 말로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작가가 이해해 나가는 방식은 논리적이며, 분석적이며, 질서정연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실질적으로 자립적이고 작동규칙이 있으며, 생명이 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혼돈과 동요를 낳고 어떤 새로운 질서로 해체되기를 반복한다. 그렇다면 현재 이세준의 혼돈의 카오스적이며, 파라독스적인 작업은 작가가 찾아내고 연구하는 또 다른 질서와 패턴을 찾아가는 단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어떤 징조와 과정으로 보이는 이유는 작가는 끊임없이 철학, 종교, 천문학 생물학, 물리학 등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탐구하고, 조사하고, 기록하고, 작업에 적용하려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를 데이터로 만들고 정리하고, 분석하는 과정들을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으며, 자연스럽게 어떤 법칙과 패턴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지속적으로 쌓여가고 있는 그만의 데이터가 어떻게 형성되고 변해가며, 어떤 방식으로 표현될 지는 아직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현재 작가가 발견하고 새로운 질서와 패턴으로 이루어진 세상이 구축되어 가는 과정의 시작점을 보고 있으며, 이것이 점차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어 변해가는지 그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작업이 내심 기대가 되는 이유이다. (2014)

EXPLORING THE UNSETTLED WORLD : CRITICISM OF SE-JUN LEE’S WORK AT THE YANG-JU  ART STUDIO, WRITTEN BY SEUNG-O SHIN (DIRECTOR OF PERIGEE GALLERY)

21st century is passing uncertain days more than ever. There aren’t any clear ideologies guiding the publics or any other religious truth that people can trust strongly. It is not a single ideology that changes the world, now several ideologies are spread around the world. It seems that we respect others or stay in peace and enjoy freedom together, but the world are struggling against the chaos. Showing respect and a sympathy, people don’t choose which side they are on, so that the unproductive and complicated situations are made. And it seems like the situation repeats again and again. The scholars have kept studying on this world in various fields. Of course there is one that becomes an ideology which leads the world, but also there are the others that disappears, not being the mainstream. Despite all these studies, the world we live seems not comprehensible. It seems that the nature on this planet are tangled so complicated, just as it was born with incomprehensibility, a mystery. In the process of the human history, Se-Jun Lee pays attention to everything which is originated from the natural cause.

As now look for the Lee’s work, his painting has a sophisticated structure. In the picture, there are plenty of things going on. Diverse plants and animals, parts of human bodies, smoke of something, building materials or industrial products that are thrown out. Various of splendid colours look organic view, appearing to be the universe. The work tends to be a kind of surrealism which has a factor of an abstract painting. And an each piece of the pictures, takes on the roles as an individual work, not only being all together as one. Let’s follow what Lee says about his own work. He tries plenty of things on the work, as I could see in the picture. Images in the picture are based on his own experiences and memories. He tended to show situations or conditions, not to focus on reviving a detailed image, eliminating an identity of objects. Moreover, in order to represent the objects of each images on the canvas efficiently, he dissolved perspective, used various contrasts of colours and objects(such as complementary contrast), brushing thin textures, flowing and spraying. And also Lee seeks after a picture that can not be figured out at a look and a picture that the part and the whole is blended so that the every boundary gets collapsed. Therefore, Lee’s work could be displayed in variable structures at exhibition halls. The work seems so spontaneous, intuitive and unrestrained, yet it is a calculated effect that he intended to.

Interviewing Lee, I asked two things. First, a question about his view of the world. He says that the world is not comprehensible, judged by himself. And so it led him to choose the complicated way of works to understand the essence of the world as far as he could. He believes that the world is all connected. And the world has never been a simple structure so it’s impossible to realize it in a single image. Thus he pays attention to the diverse points of view which are hid under the structure. When you find out how they are hidden and linked under the structure, you could get near to the essence of the world, he says. He also uses various methods in order to avoid an established way of painting by collecting all the techniques of established painting. Here’s the second point I had to ask. He did not use any different medium except painting. I asked what if he had used other various mediums. It might have been more effective to represent his design. In fact, painting on canvas is restrictive as itself. Yet putting something on a canvas, the two dimensional level transforms to a universe that abstractly transcends time and space. It means that connotative meaning of inner time and space matters more here. I can tell you that painting itself forms a single idea firmly and as a matter of fact, it is apposed to his view of the world he’s chasing. Ironically, every natural object and artificial thing in the picture is all connected to his theories or points of view and could not be one sided at the same time. As his goal was to put ‘diversity and complementariness of the world’, he needed the contrast of the design and of the way of presenting also, so as to achieve his goal.

Lee premised that the goal of his work was impossible to achieve, yet was full of aspiration to find out the causation and the algorithm of the world. This attitude seemed to keep him sincere on the goal. As you know, when the two saw a case, it is rare that one and another remember it in the same way. People see and understand things individually, sometimes see another when they are in a group and moreover, artists see others with aesthetic sense. What Lee is interested in, is various things resulted by different subjects and generating complex diversities. The work that keeps increasing in the number of canvas, on the other hand, increases more stories when ‘other’ enjoys the picture and meets ‘I’ of the work. When the relationship continues between I and other, the work completes at last. Here’s an interesting point. When all the contrasts appear, they emphasis the world which is full of paradoxes. Although Lee knew his goal was impossible to achieve and the world was incomprehensible at the beginning, the work was progressed and patterns were made throughout the rule that he designed. At the end, the fact that he chose a medium which was painting only, disproves what he said, but also shows the direction that he tried to keep, on the contrary.

The world we live that Lee try to say, could be explained by complexity, diversity, simultaneous and plural characteristics. However the way he progresses on the work is logical, analytic and systematic. The society we belong practically has rules, is self-supporting and alive. The society has been producing chaos, restlessness and new orders, repeatedly dissolved over and over. Then, isn’t that the chaotic and paradoxical work is a step to create another new order and pattern of the world? I could tell that his work seems an precursor and a progress, because he tries to search and study various fields like philosophies, religions, astronomies, biologies and physics, but also applies them into the picture continuously. He spares no pains in recording, organizing and analyzing them, while discovering rules or patterns naturally. No one knows how they transform, how they appear in his work in the future. Yet we are seeing a progress of the world that are built with new rules and patterns by Lee, with our own eyes. I’m glad to wait and see how he progresses the work further. (2014)

무한을 유한 속에 담는 방법 (이세준 개인전_‘무한을 유한 속에 담는 방법’ 전시서문)

박순영(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우리가 속해 있는 세계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어릴 적부터 사람, 동물, 감정, 감각, 여러 사물과 사건들, 내 주변에 있는 그리고 내 안에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알고 싶어 했다. 이것들은 어디서 온 것인지, 왜 존재하는지 하는. (작업노트)


이세준의 화폭은 무수한 이미지들이 가득하고 그것은 오로지 색으로만 표현되고 있어서 시각적인 일렁임이 강하게 느껴진다. 하늘과 숲, 물 등 자연물로 이루어진 풍경에는 동식물들이 복잡하게 엉켜있고 곳곳에는 인체들이 정육점에 매달린 양처럼 핑크빛을 띤 채 속속들이 자리하고 있다. 때로는 구체적인 형태를 띠기도 하고, 풍경과 섞여서 모습이 일그러져 있기도 하다. 칠해진 붓자국이 섬세하기도 하고, 때론 그 붓자국 자체만 강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언뜻 보면 쉽게 눈치 챌 것 같이 익숙한 풍경처럼 보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화면 전체가 혼란스러워서 낯설고 음침한 기운이 느껴지기도 한다. 인위적으로 꾸며진 이야기 같으면서도 실제로 어떤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여하튼 그의 그림에는 많은 것이 들어있는 데 화면구성이 구조적이지 않고 오히려 불가능한 방식으로 배열되어 있는데다가 오직 색만이 존재하는 세계처럼 표현되어서 무엇보다 회화성이 강하게 느껴진다.


그의 작업을 보면서 고갱의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라는 위대한 작품을 연상하였다. 숲이든 인체든 색채든 구도든, 닮은 요소들이 많아서 그럴 것이다. 이에 대해 이세준은 “그는 왜 낙원만 그렸을까”라고 말한다. 그는 낙원과 나락이 같이 있어야 세계가 온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다분히 실존적이다. 그는 우리를 포함하지 않는 외부의 세계는 인정하지 않고 지금 현재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계에만 집중한다. 그래서 이성으로 세계를 구성하려고 했던 기획이나 종교적으로 세계에 종속되기 위한 시도 보다 그림을 그리는 방식을 택했다. 그림을 통해 세계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그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마 세상은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무진장할 것이다. 그러한 무한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 그림이라고 생각하고서 화폭에 담으려고 하니 분명 어려운 일이다. 하나의 대상을 통해 세상을 읽어내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원근법을 적용해 광경을 포획하려 하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한정지어진 화면에 세계를 담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이세준의 그림에서 이미지나 형상보다 색이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이 그가 시도하는 방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왜냐하면 색은 변하기에 생생하고, 선에 포함되지 않으면서도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17세기 바로크미술이 등장하기 이전까지는 합리적인 이성을 중시하는 시대적 분위기에 따라 색보다는 형태를 중시하였다. 근대미술비평의 장을 연 로제 드 필(Roger de Pile)이 예술가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구도, 드로잉, 표현과 함께 색채를 포함시키면서 색과 선의 논쟁이 시작하였다. 그의 기준에 따르면 루벤스가 푸생을 제치고 최고점을 받았다. 그는 색채주의자인 티치아노를 라파엘로보다 높이 평가했다. 색채로 형태를 드러내는 그림은 일단, 알베르티의 원근법을 신뢰하지 않는다. 원근법은 색을 가두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있지도 않는 선으로 실제하는 색을 표현하려다보니 세계를 완벽하게 묘사하려던 의도와 달리 오히려 세계의 생생함을 제거한 채 표면만 남은 박제로 만족해야 할 뿐이다. 색을 기준으로 그림의 가치를 저울질 하는 것은 사뭇 유치하다고 할 수 있으나, 이를 기점으로 고전과 현대회화의 논쟁이 발생했다는 것은 그 당시 무척 중요한 문제였고 그의 의견이 살롱들을 통해 힘을 얻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중요한 건, 현대의 회화가 원근법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만큼 색채를 존재론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색은 시대와 장소, 그리고 보는 자에 따라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무궁무진한 세계를 드러낼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요소이며, 회화는 색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유일한 매체이기 때문에 세계를 오직 색으로만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하면서 온전히 색으로만 자연을 표현한 세잔의 후예처럼 이세준 또한 현재를 살아가는 화가로서 색채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자연을 되살려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색채뿐이네. 선들은 색조들을 마치 죄수들처럼 가두고 있지, 나는 이들을 해방시키고 싶어. 나는 떠도는 것들을 손에 잡으려 한다네. 왼쪽, 오른쪽, 여기, 저기 어디서든 그것의 톤과 빛깔과 뉘앙스를 포착해 결합시키는 거야. 그것들은 선이 되고,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사물이 되고 바위와 나무들이 된다네, 그것은 부피를 가지고 밝기를 지니지. 만약 이 부피와 밝기가 캔버스에 들어맞고, 내 감성에 들어맞고,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구도와 배색을 갖춘다면 그걸로 된 걸세.”(세잔) 이는 세잔이 젊은 시인인 조아생 가스케에게 한 말이지만, 이세준의 작업을 보면서 떠오른 말이기도 하기에 마치 이세준에게 한 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다만, 세잔이 풍경을 통해서만 세계를 이해했다면, 이세준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현재의 사건들을 통해 세계를 드러내려 한다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 회화 안에는 일상과 미디어에서 발견한 이미지들, 그리고 의미의 추적이 불가능한 모호한 이미지들이 뒤섞여서 동시에 존재한다. 그것들은 다양한 관계를 이루며 화면에 배치되고, 각각의 독립된 사건들을 이루는 주체가 되며, 화면 안에는 그러한 사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작업노트)


이세준은 객관화될 수 없는 세계를 화폭에 담기 위한 방법으로 기억과 형용사를 사용한다. 그의 그림에는 색을 통해 자연이 보인다기 보다, 색으로 인해 일렁이는 사건들이 보인다. 색들이 서로를 넘나들려고 하면서 긴장감을 형성하고 그러다가 하나의 형상으로 드러나기도 하면서 말이다. 루이스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는 웃음짓는 고양이가 등장하는데, 고양이가 사라지고도 웃음만 남아있는 묘한 상황이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형용사가 존재하고 고양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것이 어떻게 구체적일 수 있을까. 색이 형용사 자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선을 통해 형상들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혼재된 색들로 인해 형상들이 드러나는 표현이라면 가능할 수 있다. 이러한 지점이 이세준의 작품을 계속해서 보도록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것이 그가 세계를 담기 위해 표현하고 있는 사건일지도 모른다. 그것도 낙원과 나락이 혼재하는 무정형의 세계에서 말이다. (2013)

미로에서 되찾은 시간들 (이세준 개인전‘지금, 이곳에서는 어떤 일들이’전시서문) 

이선영(미술평론가)

‘지금, 이곳에서는 어떤 일들이’(전시부제)를 묻는 이세준의 전시에 대해 한 마디로 답한다면, 실로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고 말할 수 있다. 주로 나타나는 도상--풀, 나무, 화분, 그림도구들, 드로잉, 곤충, 파충류, 맹수, 인체 등--이 몇 가지 있기는 하지만, 그 조합의 수는 무한하기에 그의 작품은 무척 다채롭고 복잡해 보인다. 크든 작든 하나의 화면에는 여러 도상들로 붐비는데다, 여러 크기의 화면들이 종횡무진 이어지며 공간을 장악해 나가는 방식 또한 관객으로 하여금 길을 잃게 한다. 그림의 배경 자체가 언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를 정글의 이미지가 우세하다. 그것이 문명적 장소라면 안팎의 구별을 와해시키는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 같은 부조리한 구조물이 등장하곤 한다. 전시는 화면 안팎 모두에서 뿌리줄기 식으로 이어지는 미로를 이룬다. 미로는 출구를 찾기 힘든 복잡한 길을 의미한다. 자크 아탈리는 [미로]에서, 미로는 유목민들이 정주민들에게 준 마지막 메시지라고 말하면서, 이제 직선을 넘어 미로가 복귀하고 있다고 예언한다. 직선은 발전을 위한 전망을 가지지만, 꼬불꼬불한 우회로로 이루어진 미로는 시간을 절약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공략하고 소비한다.
이세준은 미로 같은 작품 역시 한정된 공간 안에 무수한 길을 만들고자 한다. 아탈리가 말하듯이 예술에서는 길을 잃는다는 것이 창조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수많은 일들 중에, 예술이란 잃음으로서 얻는 것이 많은 것 중의 하나가 아닐까. 이세준의 작품 속 서사 또한 미로이다. 그의 작품을 보고 읽는 것은 미로를 통과하는 것과 같다. 끝이 없을 것 같이 이어지는 사건의 행렬은 축제와도 같은 즐거운 혼돈으로 가득하다. 그는 이러한 무아경적 스펙터클을 통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사건들 대부분은 정의할 수 없다. 구체적 도상들이 등장하지만 읽으려 하면 할수록 미궁 속으로 빠지게 하는 그의 작품에서, 이세상은 이해할 수 없음이라는 태생적 불가해성을 가진다. 그가 이러한 불가지론의 지경에 빠지게 된 것은, 그가 처음부터 회의주의자였거나 세계에 대한 인식의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반대로 무익한 방황으로 보일 수도 있는 이 난감한 결과는 그러한 노력의 과도함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생물학에서 천문학까지, 신화에서 종교까지, 음악에서 문학까지 식을 줄 모르는 열정으로 다양한 분야를 섭렵해온 젊은 예술가의 전형이다.
동시에 그림은 그 모든 것들을 집약시켜주는 장이라는 점에서 그는 전형적인 화가이다. 그림이라는 결정적인 수단을 가지고 있음으로 인해, 그의 섭렵은 공중으로 흩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소비에 머무는 문화와, 생산이라는 결정적 계기를 가지고 있는 예술의 차이이다. 그러나 본래의 모습 그대로 재현되는 것은 아니다. 재현은 어떤 차원을 생략해야만 가능한 것에 반해, 그는 그가 접한 것들을 손실 없이 담아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손실은 불가피하다. 이세준의 작업에서 직접 관찰보다 기억이 가지는 더 큰 비중을 생각할 때, 잃어버린 시공간을 찾는 과제는 무엇보다도 긴요하다. 독립적이면서도 이어지는 장면들은 공존과 병렬, 기억과 지속, 동시성과 공명 등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재현주의의 일면성을 피해가는 그의 방식이다. 여러 요소들은 의식과 무의식의 차원에서 함께 작동하면서 작품이라는 복잡한 텍스트를 짜나간다. 그림은 그의 감성과 지식, 관심과 경험에 닿은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을 모자람 없이 담아내는 큰 그릇이지만, 그 용광로는 아직도 끓고 있는 중이기에, 그 안에서 명멸하는 사건들은 명확한 좌표 속에 고정되지 않는다.
이세준의 그림은 세상에 대한 열정적인 질문과 대답의 연속이다. 질문은 끝이 없으며 어떠한 대답도 결정적이지 않다. 이러한 인식의 불확정성은 속 편한 불가지론과는 다르다. 그의 작품에는 일련의 서사가 있지만 기승전결 같은 서사의 구조가 없다. 그것이 증식되는 방향 또한 확정되지 않는다. 이세준은 ‘세상은 마치 한 눈에는 미처 전부 들어오지 않는 그림과도 같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역시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 그림을 그린다. 원래 주택이었던 장소를 전시장으로 개조한 공간의 구조는 미로식의 작품과 어울린다. 낮은 천정에 경사지게 접어 넣은 캔버스나 이런저런 통로로 연결된 그림들을 이동하면서 봐야하는 구조는 결코 하나의 시점으로 일괄될 수 없다. 따로 또 같이 작동하는 화면들을 이어주는 작은 그림들이나, 그림 바깥으로 나와 있는 오브제들은 그림의 경계를 넘어서려 한다. 캔버스 여러 개가 가운데 사각형을 남겨 놓고 배열된 작품 ‘초여름의 틈사이로’는 전시장의 빈 벽면도 작품 여백으로 활용한다. 안팎의 경계가 불확실한, 정글과도 같이 복잡한 화면 안에 여러 방식으로 배치된 인체는 서술적으로 붙여진 작품 제목과 연동되면서 일련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하는 주인공처럼 보인다.
그들은 복잡한 배경과 구별되는 화면의 주인공들이기에, 서사에 대한 기대를 낳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머리카락도 이목구비도 없는데다, 뭉글뭉글한 살덩이로 등장하는 인체들은 개체로 분화하기 이전의 사람에 대한 원형질이다. 인체 뿐 아니라 그의 작품에 편재하는 뭉실 대는 형태들은 무엇으로 변형될지 모르는 불안정한 상태를 암시한다. 구름을 닮은 그것들은 가변성을 나타내는 기표이다. 사람 뿐 아니라, 풀, 나무, 악어 등 이세준의 작품에 등장하는 도상들의 특이한 형태는 사진적 재현이 아닌, 기억에 의한 드로잉 습관들로부터 비롯된다. 그림을 기억의 산물로 생각하는 작품들에는 머릿속에서 복잡한 것이 얽혀 있고, 그것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증식하여 쏟아져 나오는 도상이 종종 발견되곤 한다. 그는 사진을 찍기 보다는 최대한 많이 보고 보았던 느낌을 떠올리려 한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부분은 상상력으로 채워진다. 여기에서 망각은 변형과 생성의 동인이 된다. 그것은 그에게 악영향을 주었던 입시미술의 잔재를 일소하는 방식이자, 이미 만들어진 코드들의 공격으로 상상력이 마비되어 가는 미디어 사회에 역행하는 태도이다.
그것은 회화가 여타의 기계 복제에 종속되지 않고 자신의 독특한 언어를 생산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세준의 작품은 사진의 재배치가 아닌 드로잉들의 재구성이기에, 단자(monad)와도 같은 단편들은 각자의 세계를 오롯이 간직한 채 이런 저런 방식으로 연결될 수 있다. 인체 또한 다른 도상들과 마찬가지로 분리된 세계들을 잇는 매개 고리로 활용되곤 한다. 성별과 나이만을 가늠할 수 있을 뿐인 인체들은, 표정이 아니라 긴장 또는 이완되어 있는 자세를 통해 이야기한다. 대부분 그들의 육체의 상태는 대부분 육체적 전성기에 있는 젊은이들이며, 흘러넘치는 욕망은 그들을 둘러싼 온 우주의 에너지와 함께 작동한다. 몸은 우주와 함께 태어나고 소멸하며, 사랑하고 절망한다. 대부분 표정이 없고, 아예 상체가 제거되어 있는 경우도 있는 인체들은 그자체가 욕망이 상연되는 무대가 된다. 인체는 타자와 결합하기 위해 그 전체를 또는 부분을 변형시킨다. 이접은 그의 작품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이다. 자르고 붙이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이세준의 작품에서 그 에너지는 주로 나무에 숨어있다. 나무 실루엣을 가득 채우는 비정형 패턴은 개체 안에 내재된 에너지처럼 보인다.
그것은 화면 여기저기에 포진하면서 언제든 분출된 기회를 노린다. 그것들은 대우주와 소우주, 인체의 안팎을 넘나드는 또 다른 에너지의 흐름과 같은 계열이다. 다채로운 색과 복잡하게 꼬인 형태는 어떤 참조대상과도 연결되지 않은 물감 덩어리로 존재한다. 그것은 외부의 참조대상과는 무관한 자율적인 기호이며, 이러한 기호의 물질성은 작품에 내재한 차원 수를 늘려나간다. 이 물질 덩어리에는 폭발적인 에너지가 잠재되어있으며, 구체적인 도상과 상호작용하는 추상적 패턴들을 이룬다. 그것들은 화면 안에서 일어나는 각종 심리적 물리적 상징적 사건의 파장을 확장하거나 완충작용을 한다. 1번 ‘풍장 하는 시대’부터 18번 ‘시간의 틈’에 이르는, 18개의 장면이 좌우로 길게 이어진 [밤의 숲] 시리즈는 계절의 운치가 반영되곤 하는 이세준의 작품에서 겨울에 해당된다. 겨울, 밤, 숲의 시공간 이미지는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기 위해 격어야 하는 원초적 혼돈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죽음과 희생, 생존과 진화, 인류와 미래 등이 꿈처럼 펼쳐지는 [밤의 숲] 시리즈에서 인간들은 어두운 혼돈의 숲 속에서 뱀이나 악어 같은 괴물과 대결하거나 잡아먹히고, 때로 합체된다.
동물이나 동물 기관의 이미지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특히 남자와 여자 간의 관계를 중층적으로 상징하며, 색 띠로 가득 채워진 숲의 나무는 마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밤의 어둠 속에서 찬란하게 빛을 발한다. 햇빛과 신록 가득한 계절의 여운이 있는 [초여름의 틈 사이로] 시리즈는 악어나 거대한 머리 석상이 뒹구는 초록 밀림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있다. 이 시리즈 중 머리가 녹아있는 여자가 하얀 거품 형상이 가득한 밀림 한가운데 누워있는 ‘한낮에 꾸는 꿈’은 제목 그대로 백일몽과 같은 나른한 느낌을 준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의 이미지는, 만약 화가가 여자였다면 달라졌을 수도 있는 성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5명의 인체가 순차적으로 작아지며 연속적인 운동감을 보여주는 ‘소년들’에는 공간적인 형식인 회화가 어떻게 시간을 도입하는지를 애니메이션 같은 방식으로 보여준다. 낮은 천정과 모서리까지 이용하며, 퍼즐처럼 죽 이어진 설치방식이 특징인 [예술적 경험의 다양성]은 세계 안의 또 다른 세계, 즉 예술적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이의 자의식--‘드로잉을 고르는 순간’, ‘어떤 예술적 고민’, ‘페인트칠하는 남자’ 등--이 보다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작품 ‘선택받지 못한 작품들’에서 깊은 고뇌의 흔적을 잔뜩 머리에 이고 있는 남자는 화분에서 자라나고 있는 에너지 패턴의 나무처럼 영감이 자연스럽게 성장해주길 바란다. 화분 속의 식물은 때로 거대한 밀림을 이루기도 하니까 말이다. 머리에서 자라난 혹은 피어오른 상상력에는 직선적인 것이 없다. 그것은 무엇으로든 변형 가능한 유동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원동력 또한 자연적인 것이다. 문인지 액자인지 알 수 없는 공간을 통과하는 사람이나 자기가 속한 평면을 칠하고 있는 사람은 여러 차원을 넘나드는 회화의 특징이 드러난다. 차원의 넘나듦을 상징하는 도상 중의 하나는 끝없이 이어진 계단이다. 논리적으로는 가능하지만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한 이 위상기하학적 공간들은 화면 여기저기에서 나타나며, 여러 화면들을 연결시켜주기도 한다. 낮은 천정과 모서리를 이용한 설치작업이 돋보이는 [예술적 경험의 다양성]에는 크기가 다른 여러 화면을 이어주는 화면 안팎의 장치들이 있다. 일렬로 연결된 [한마디로는 정의할 수 없는] 시리즈는 세계와 예술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나타낸다.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지만, 결코 모색을 멈추지는 않는다.
작가에게는 ‘한마디로 정의될 수 없는’ 것이 바로 세계이고, 그러한 세계를 가장 효과적으로 담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예술의 언어는 과학 등 여타 다른 분야의 언어보다 복잡다단한 현실계를 포획하기에 적절하다. 그것은 예술이 은유의 언어이며, 인간의 사고 또한 본질적으로는 은유적이기 때문이다. 한 눈에 포괄할 수 없는 이세준의 그림은 다양한 우주가 똬리를 틀고 있으며 예기치 못한 연결고리를 통해 상호적 변형이 이루어지는 장이다. 엄청난 식욕으로 흡수한 지식과 경험들이 원동력이 되어 자라난 상상력은 하나로 정리된 결정론적 인과 고리가 아니라, 다양한 고리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조차도 매순간 재구축된다. 끝없는 이야기를 이어가는 ‘그리고’ 라는 접속사는 느슨하지만, 전체를 흩어지지 않게 해준다. 쉬지 않고 하는 드로잉들, 특히 작은 그림들은 미지의 거대한 퍼즐을 연결하는 작은 단편들로 작동하곤 한다. 그의 작품은 각각의 세계이면서 동시에 서로 상호작용이 가능할 수 있는 연결고리가 있는 다원적 우주에 대한 유비로 다가온다. 하나의 시점으로 일괄될 수 있는 총체성 대신에 병렬적 집합을 이루는 그의 작품에는 여러 도상들과 패턴들만큼이나 여러 소리들이 들려온다.
원초적 혼돈 또는 축제의 기운이 역력한 이세준의 작품은 안정된 선율이나 화음의 조화보다는 다성적(polyponic)이다. 공간적 복수성은 시간적 복수성의 이면이다. 작품 속 도상은 사물자체보다는 그 이전이나 이후의 유동적 상태를 나타낸다. 그의 작품에는 서사가 있지만, 결론을 향해 최 단축 거리를 설정하는 논리적 언어와는 다른 서사이다. 그것은 시간예술인 음악이나 문학과는 다른 조형예술만의 방식인데, 관객의 시선은 독자나 청자와 달리 정해진 경로를 따를 필요가 없다. 공간적 형식인 미술은 이 부분을 봤다가 저 부분을 봤다가 할 수 있다. 정해진 시간적 연속으로부터 벗어나, 관객이 조합하는 방식에 따라 매번 이야기는 다르게 펼쳐질 수 있다. 다양한 시점이 복합되어 있는 이세준의 작품은 이러한 미술의 어법을 최대한 부각시킨다. ‘여러 사건의 조직’(아리스토텔레스)을 뜻하는 고전적인 의미의 플롯 역시 느슨해진다. 어떤 목적과 계획을 추진시키게끔 되어 있는 작품 속의 사건은 에피소드 형식으로 와해된다. 그러나 아무 연관 없이 나열하지는 않는다. 생명을 이루는 구성요소들을 찾아내 단지 하나의 상자 안에 넣고 흔든다고 해서 생명이 탄생하는 것은 아니다.
기계이든 유기체이든 효과적인 연결망이 있어야 작동하는 것이다. 이전 시대에는 그것을 ‘존재의 대연쇄’를 창조한 전지전능한 신에서 찾기도 했지만, ‘숨은 신’(루시앙 골드만)의 시대에 그것은 각자 찾아야 한다.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사건들이 알고 보면 이런저런 고리에 의해 연결망을 이루듯이, 이세준의 작품은 또한 연결망을 지향한다. 그런 연결망이 명확히 감지되는 않는 이유는 그의 작품이 하나의 주된 줄기를 가지는 나무모델이 아니라, 뿌리줄기의 모델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는 ‘시작도 끝도 없이 중간에서 헤매고 있는 나의 그림은 마치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도 닮아있다’고 밝힌다. 현대소설의 어법을 확립한 이 ‘탈 중심화 된 구성’은 현대미술의 어법과도 유사하다. 공간적으로는 중심과 주변의 유기적 관계가 해체되는 것이며, 시간적으로는 과거와 현재의 관계가 달라진다. 사물과 말, 사건과 서사, 지각과 기억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현대예술은 이 간극에 대한 자의식으로부터 탄생했다. 가령, 시간을 주제로 하는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마르트 로베르는 [기원의 소설, 소설의 기원]에서 소설이 재생하고 추구하고 지우고 예견하는 것은 특히 시간이라고 말한다. 마르트 로베르에 의하면, 소설이 끊임없이 그의 가짜 연대기 속에서 다시 시작하게 만드는 것은 개인 이야기, 혹은 간단히 말해서 역사이다. 그런 의미에서 ‘잃어버린 시간의 탐구’라는 제목은 소설이 실로 지닐 수 있는 제목일 것이다. 소설이 잃어버린 시간의 탐구이고 감정교육이며 배움과 형성의 시기, 다시 말해서 사용된 시간과 공간의 탐구인 것이 사실이라면, 소설은 환상과의 관계를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게 된다. 미니멀리즘 이후 현대미술 역시 시간성에 대한 감각을 고양시켜 왔다. 모더니즘에 전제된, 공간적 관계의 명료성이라는 미학적 이데올로기는 시간이라는 불순한 요소에 의해 시작도 끝도 없는 불분명한 과정으로 변모했다. 이러한 현대미술의 추이는 회화라는 형식의 억압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이세준은 회화를 통해 이러한 현대적 감수성을 표현한다. 현대예술의 추이가 그래서일 뿐 아니라, 인생 자체가 그러하다. 우리 인생을 잡다하게 채우는 수많은 단기적인 목표들은 목표 없는 시간에 대한 공포증에 불과하다. 이세준의 작품은 이러한 시공간 간극들에서 예술 활동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짐을 알려준다. (2012)

THE TIME RETRIEVED FROM LABYRINTH

SUN-YOUNG LEE (ART CRITIC)


"What are happening here and now?" (subtitle of the exhibition) is the question asked in the exhibition of Se-jun Lee. To answer it briefly; so many things are happening. There are some figures appearing in his drawings - grass, tree, flowerpot, painting supplies, drawing, insects, reptile, wild beasts, human body, etc. - and the infinite number of their combination makes his works look very diverse and complicated. Whether they are large or small, the various drawings make a picture crowded, and the pictures in various sizes are connected horizontally and vertically to control the space making spectators lost in them. The background of the picture is mainly the image of a jungle where you can't expect what will pop up next and when. If it is in a civilized place, an absurd structure like endless stairs which blur the border of inside and outside appears. The exhibition comprises a labyrinth where inside and outside of the pictures are all connected like a rhizome. A labyrinth means a complicated trail in which it is very difficult to find an exit. In Labyrinth, Jacques Attali says that labyrinth is the last message of nomads for settled people, and predicts that now the labyrinth is returning after the straight line. While a straight line has a vision for development, a labyrinth composed of winding detours does not save time but attacks and consumes time.

Se-jun Lee attempts to make numerous trails in a limited space in his work of labyrinth, because as Attali said, losing one's way is the condition for creation in arts. Art will probably be one of the numerous matters in the world in which much can be obtained if something is lost. Se-jun Lee's narration in his works is also a labyrinth. Watching and reading his works is like passing through a labyrinth. The seemingly endless parade of events are filled with joyful confusion like a festival. Through such ecstatic spectacle, he tries to tell the big and small incidents happening in the world. But most of them cannot be defined clearly. Though there appear specific drawings, the more you try to read his works, the more you fall into a labyrinth. So the world is intrinsically incomprehensible. He became an agnostic not because he was originally a skeptic or he didn't make much efforts to understand the world. On the contrary, it seems that excessive efforts caused such perplexing results that can look like futile wandering. He is a model of young artist who ranges over various fields from biology to astronomy, from mythology to religion and from music to literature with enduring passion.

At the same time, he is a typical painter in that a picture is a stage where all those are integrated. As he has the decisive tool of painting, his versatility is not scattered in the air. That is the difference between a culture which is limited to consumption and art which has the decisive opportunity of production. However, it is not reproducing something the same as its original shape. In a sense, some aspects must be omitted for reproduction. But he wants to contain everything he encountered without loss. However, some degree of loss is inevitable. Considering that memory is given more weight than direct observation in Se-jun Lee's works, what is the most essential is to find the lost time and space. The independent and at the same time connected scenes are made by coexistence and parallel, memory and continuance, and simultaneity and resonance, etc. That is his style used to avoid the one-sided disposition of representationalism. Various elements work together in both consciousness and unconsciousness to weave the complicated text of a artistic work. A picture is a big vessel which can take all the big and small fragments of his emotion, knowledge, interest and experience. But the furnace is still boiling, and the incidents flickering in it are not fixed in certain coordinates.

The pictures of Se-jun Lee are a series of passionate questions and answers about the world. There are endless questions and no answer is decisive. Such uncertainty of recognition is different from light-hearted agnosticism. There is a series of narration in his works, but there is no structure of narration such as introduction, development, turn and conclusion. The direction of its multiplication is not fixed, either. Se-jun Lee thinks, "The world is like a picture which cannot be seen fully with one viewpoint." So he draws a picture which cannot be seen fully with one viewpoint. A former house was remodeled into an exhibition hall whose spatial structure goes well with the labyrinth products. Some canvases are folded and put under the low ceiling askew, and spectators must move much to see the pictures connected with many passages. Thus the pictures cannot be appreciated in package in a single viewpoint. The small pictures which connect the displays working both separately and together as well as the objets which come out of the pictures try to exceed the boundary of the pictures. Between the Crack of Early Summer, a product made of several canvases with a quadrangle in the middle, uses the blank space on the wall in the exhibition hall as a margin for the product. There are human bodies arranged in various ways in the jungle-like complicated pictures which have blur borders between inside and outside. Linked with the narrative title of the product, they look like the main characters who have to make a series of narrations.

As they are the main characters of the picture differentiated from the complicated background, they are expected to make narrations. However, most of them have no hair, ears, eyes, mouth or nose. The human bodies appear as lumpy flesh, protoplasm of man before developing into an entity. Besides human bodies, the lumpy shape existing here and there in his works signify an unstable status which can be transformed into anything. They look like a cloud and they signify changeability. In addition to human beings, the peculiar figures appearing in the works of Se-jun Lee such as grass, tree and crocodile are derived from the drawing habit depending on memory instead of photographic reproduction. In the works in which drawing is thought as a product of memory, there are complicated things tangled in the head and they multiply more than one can handle and come out in the picture. Rather than taking a picture, he tries to see as much as possible and recollect the feeling of them. What he cannot remember accurately are replaced by imagination. Here, oblivion becomes the impetus for transformation and generation. That is how he cleans out the vestige of education of art for university entrance which had a bad influence on him and goes against the contemporary media society which paralyzes imagination with the attack of the already existing codes.

It is also a way for painting to produce its own unique language not being subjugated to other reproduction by machine. The works of Se-jun Lee are not relocation of photos but reconstruction of drawings. So each piece is like a monad and can be connected with each other in various ways capturing its own world. Like other figures, human bodies are used as a link for separate worlds. It is only possible to guess the age and gender of the human bodies who speak not with their facial expression but with their posture - tense or relaxed. Most of the bodies look like youths in their physical peak. The overflowing desire operate with the energy of the entire cosmos surrounding them. The body is born, perish, love and despair together with the cosmos. Most do not have facial expression and some are removed of their upper body showing the desire by itself. Human body transforms all or a part of it to be combined with another. Removal is often seen in his works. Energy is needed to cut and attach something. In the works of Se-jun Lee, the energy is usually hidden in trees. The atypical pattern of filling with tree silhouettes seems to be the energy inherent in the individual entity. Located here and there in the picture, they wait for the opportunity to spurt their energy. They are in the same category as the other flow of energy which frequently crosses the great universe, microcosm, and inside and outside human body. The various colors and complicatedly entangled shapes exist as a lump of paint which is not connected with any reference objects. It is an autonomous sign irrelevant with outside reference objects, and the materiality of the sign increases the dimensions inherent in the product. A potentially explosive energy exists in this lump of material which makes an abstract pattern interacting with specific figures. It expands the wave of various psychological, physical or symbolic events happening in the picture or plays the role of a cushion. The series of Night Forest is composed of 18 scenes - from #1 'The Era of Sky Burial' to #18 'The Crack of Time' - that are arranged in a long line from left to right. The series corresponds to winter in the works of Se-jun Lee who often reflect the flavor of seasons. The images of the time and space of winter, night and forest are suggested as the image of basic chaos to be experienced before making a new beginning possible. In the series of Night Forest, in which death and sacrifice, survival and evolution, and mankind and future are presented as a dream, human beings fight with snakes, crocodiles or other monsters in the dark forest of chaos. Sometimes they are eaten by the monsters and sometimes they are combined with them.

The images of animals or animal organs symbolize the relationships between man and nature, man and man, and especially man and woman in superimposing method, and the trees in the forest filled with colorful bands shine brilliantly in the darkness of night like stained glass. The series of Between the Crack of Early Summer has a lingering imagery of the season of sunlight and verdure. There are incidents happening in the green jungle where crocodiles and huge head stone statue are scattered. In the series, 'A dream dreamt at high noon' shows a woman with a melted head lying in the middle of the jungle filled with white foam. Like its title, the picture gives a drowsy feeling like a daydream. The image of woman appearing in his works plays a sexual role, which may have been different if the artist were a woman. In 'Boys', the 5 human bodies become smaller stepwise to show continual sense of motion. It shows how a picture, a spatial form, adopts time in an animation-like method. The series of Diversity in Artistic Experience uses even the low ceiling and corners with puzzle-like installation. It directly shows the self consciousness of the people living in another world in a world, i.e., the world of arts, with ‘The Moment of Choosing a Drawing’, ‘An Artistic Agony', 'A Painting Man', etc.

In the work of ‘Unchosen Products’, the man with much trace of agony on his head hopes that his inspiration can grow naturally just like the energy-patterned tree growing in the flowerpot. Sometimes the plants in the flowerpot are turned into a huge jungle. The imagination grown or blossomed in the future is not straightforward. It is flexible to be changed into anything, and the impetus is also very natural. The man passing through the space of a door, or a frame, or the man painting the plane where he belongs to, shows the characteristic of the painting in which they cross over many dimensions. One of the things that symbolizes crossing over many dimensions is the endless stairways. It is possible logically, but impossible physically. These topological spaces appear here and there in the picture and sometimes they connect many pictures. In Diversity in Artistic Experience which shoes distinguished installation work using low ceiling and corners, there are devices inside and outside the picture which connect many pictures of different sizes. Being connected in a row, Impossible to Define in a Word series shows the thoughts of the artist about the world and arts. Though it is impossible to define in a word, the attempt is not stopped.

For the artist, What is Impossible to Define in a Word is the very world, and arts can express such world the most effectively. The language of arts can capture the complicated reality better than the languages of other areas such as science. It is because art is a language of metaphor, and the thoughts of man are metaphoric intrinsically. The pictures of Se-jun Lee cannot be comprehended with one viewpoint. Various cosmos is coiled up in there and mutual transformation occurs through unexpected link. The imagination grown on the basis of the knowledge and experience absorbed with tremendous appetite is connected with various links, not with one summarized deterministic link of cause of effect, and even that is reestablished every moment. The conjunction of 'and' which is used to narrate the story without ending is loose, but it holds the whole sentence together and not to be scattered. Drawings painted endlessly, especially the small drawings, operate as the small pieces that connect the huge unknown puzzle. His works function as an analogy for pluralistic cosmos which is an entity in itself and can make interaction with a link. His works comprise parallel gathering instead of wholeness which can be comprehended with one viewpoint. In result, there are as many voices as the figures and patterns.

The works of Se-jun Lee are filled with basic chaos or festive energy. They are polyponic rather than stable melody or harmony. The multiplicity in space is the other side of the multiplicity in time. The figures in the picture do not show the object itself but the fluid status before or after that. There are narrations in his works, but they are different from the logical language which seeks the shortest distance to reach conclusion. It is a method for formative arts, which is different from that of music or literature which is an art of time. The eyes of the spectators do not have to follow a fixed route, unlike readers or listeners. When you appreciate fine arts, which is a spatial arts, you may see this part and then hop to see the other part. Free from the fixed sequence of time, the story may become different every time depending upon how the spectator combines it. With various viewpoints, the works of Se-jun Lee bring such language of fine arts into relief to the utmost. The classical meaning of plot, which means 'organizing various incidents' (Aristotle), becomes loose. The incidents in the product which are to implement a certain purpose and plan are broken down into episodes. But they are not arranged without any connection. You cannot give a birth to a life even if you find the elements which compose a life, put them in a box, and shake the box.

Whether it is a machine or an organism, there must be an effective link for it to operate. In the past, it was sought in omnipotent God who created the 'Great Chain of Being'. But in this era of ‘Hidden God’ (Lucien Goldmann), everyone needs to find it. As incidents lying in distance in time and space turn out to be linked in this way or that, the works of Se-jun Lee aims to have such links. The reason that the links are not noticed clearly is that his works are not made with a tree model which has one main stem but with the model of a rhizome. He says, "My paintings do not have beginning or end and are wandering in the middle. They resemble In Search of Lost Time, a novel written by Marcel Proust. The 'decentralized structure' of the novel which established the use of language in modern novel are similar to the language of modern fine arts. In space, the organic relationship between the center and the periphery is disassembled, and in time,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ast and the present becomes much different. There are gaps between things and language, incidents and narration, and recognition and memory. Modern arts were born by the self-consciousness of these gaps. For example, the main character in In Search of Lost Time, a novel with the theme of time, makes effort to retrieve time.

In Novel of Origin and Origin of Novel, Marthe Robert said that what a novel reproduces, pursues, erases and predicts is especially time. According to him, what a novel continues to make in its fake chronicle is a personal story, or, simply speaking, a history. In such regard, the title of In Search of Lost Time is very adequate for a novel. If it is true that a novel is a search for time, emotional education, and the search for the period of learning and formation, or the used time and space, it is possible to adjust the relationship between a novel and a fantasy. After minimalism, modern fine arts, too, has enhanced the sense of time. The aesthetic ideology of the clarity in spatial relationship which is the prerequisite for modernism was transformed into an unclear process without beginning or end. Such trend in modern fine arts was realized by suppressing the form of painting, and Se-jun Lee expresses such modern sensitivity through painting. Aside from the trend of modern arts, our life is like that. The numerous miscellaneous short-term goals in our life are set merely due to our fear of the time without any goal. The works of Se-jun Lee tell that genuine artistic activities are done in such gaps in time and space.

우리는 우리가 속한 세상을 과연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는가?


나는 언제나 내가 속한 이 세상을 온전하게 이해하는 것을 갈망했다. 이 세계가 무엇인지 어떻게 생겨났는지, 또 왜 존재하는지 등이 너무나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겪어온 삶의 경험을 토대로 의미를 반추해 보거나, ‘천문학’이나 ‘생물학’, ‘화학’ 등의 자연과학 책들을 탐독했으며, ‘미시사’와 ‘문화인류학’, ‘심리학’과 같은 것들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그리고 ‘미술’, ‘문학’, ‘음악’과 같은 예술들과 종교와 철학과 신화들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분야의 많은 것들을 하나하나 공부하면서 세상을 더욱 잘 이해 할 수 있게 되리라는 기대와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이 세계는 언제나 그런 것처럼 나에게 그것을 관통하는 하나의 정의를 주지 않았다. ‘세상은 마치 한 눈에는 미처 전부 들어오지 않는 그림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세계에 대한 인식을 작업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내 그림 속에는 개인적인 경험을 반영한 다양한 환유의 상징물들과 의미의 추적이 불가능한 모호한 이미지들이 뒤섞여서 동시에 존재한다. 이 도상들과 이미지들은 내가 수집한 ‘세계의 일부’인데, 나는 이것들로 다양한 관계를 만들어 내면서 이리저리 화면에 배치한다. 이들은 각각 독립된 사건들을 이루는 주체가 되며, 화면 안에는 그러한 사건들이 동시다발적이며 산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나는 이번에 몇몇 작업에서 캔버스 하나에서 작업을 시작해서 계속 옆이나 위나 아래로 캔버스를 붙이며 화면을 확장해 나가는 시도를 했다. 이러한 방법으로 작업은 유기체처럼 자신을 스스로 증식해 나가며, 결국은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 모습에까지 도달하게 된다.

물리적인 한계로 인해서 그림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으로, 우리가 우리의 세상을 단편적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회화의 인식에서도 태생적으로 불가해를 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작업 안에서 이미지들이 벌이고 있는 사건들을 보면 마치 어떠한 서사의 구조를 지닌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마치 현대판 신화와도 같은데, 다만 그 차이점이 있다면, 여기에는 그 어떤 기승전결도 없다는 점이다.

회화 안에는 시작도 끝도 없어서 사실상 결코 서사의 구조라고 할 수 없는데, 이는 내가 세상을 인식하는 시선을 반영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진리나 역사라고 부르는 것들이 어떤 한 점을 향해 나아간다거나 발전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작도 끝도 없이 중간에서 헤매고 있는 나의 그림은 마치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도 닮아있다. 이 소설은 끝나지 않는 긴 문장과 집요한 묘사에 인해 전체의 줄거리를 이해하기 어렵기로 악명이 자자한데, 결국 그러한 그의 글쓰기 방식이 전체의 줄거리가 아닌 분위기나 감정, 혹은 그 복잡함 자체에 대하여 집중하게끔 이끄는 것 같다. 나 역시도 이러한 구조를 충분히 의식하며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탈중심화 된 구성을 통해서 그동안 우리가 보기를 피해왔던 어떠한 감정들과 정서에 직접 연결되는 지점을 모색하고자 하는 것이다. (2012)

HOW MUCH CAN WE UNDERSTAND THE WORLD THAT WE BELONG TO?


I have been tempted to understand the world that I belong, so eagerly. I mean the whole world as it stands. I’m interested in what the world is. How did it all start and why does it exist anyway?

So I started with searching natural sciences like ‘astronomy’, ‘biology’ and ‘chemistry’, or with ruminating what I have experienced so far. And I believed that I was getting closer to understand how the world works, as I studied religions, philosophies, myths and arts including ‘painting’, ‘literature’ and ‘music.’


However, one word that can define the whole world was never allowed to me, as it always does. I thought, ‘It seems like the picture that could not be possible to figure it out, at a look.’


My works are basically about perception of the world. In my painting, various metonymic symbols from my personal experiences and ambiguous images that can not be tracked by any meanings are put in disorder. These icons and images are ‘parts of the world’ I collected. I arrange them to create varied relationships with each others. And each of them becomes subject of its event, so plenty of events are scattered independently and simultaneously.

This time, I made an attempt to start painting with a canvas and gradually add more, keep linking another and others to preceding one by the side, top or bottom of the canvas. In this way, the picture was bred for itself like an organism, eventually come to the one that possibly could not be figured out at a look.

For the physical limits, the picture can not be seen at a single glance, as we understand the world fragmentarily. It comes to me that incomprehensibility natively inheres in the perception of painting.


Events going on in the picture seem like having a structure of narration. The picture shows us kind of a modern myth, however, the thing is that there is no four steps(an introduction, development, turn and conclusion) in composition at all.

In fact, the structure of narration that I’m saying doesn’t exist in painting, as there is no beginning or ending. And it demonstrates the way I recognize the world. Because I think that the truth or history doesn’t progress to the certain point.

With no beginning or ending, the picture wanders and it resembles 「In Search of Lost Time」, a novel written by Marcel Proust. It is known well for the long sentences that never ends and tenacious description which make readers be hard to understand the whole story. His writing style lead them to focus on the atmospheres, feelings or complicity itself, not on the synopsis. I’m aware of this enough while making progress. With the de-centering composition, I’m seeking the moment connected directly to the feelings that we were avoiding to face. (2012)

SEARCHING MEANINGS FROM MEANINGLESS

I was brought up in Pyeong-taek, Gyeong-gi province. In my early days, the city was not developed much, full of green grasses, trees and fields. The residence I lived was near to the US militaries, so in my memories, home reminds me a rural landscape with a place of amusements, brothels, exotic stores mostly for US soldiers and the sound of firing during their training. All of them together seem to be quite odd and strange to me.


I am perplexed when I face something which I can not define in one word and face the things that seem not get together and coexist at the same time, such as the memories of hometown in my childhood. My work is about processes tracking those complex and indecipherable objects which are entangled. I would like to represent the indefinable objects into the visual image in the end.

The first thing you may notice in the picture above all, is unconventional and glam colors dominating all over the canvas. The feast of colors of high brightness helps the painting seem even more chaotic and lets it free from modern perspective. Linear perspective is manipulated so that the landscapes are in a jumble, the size of objects are converted so that the front and rear is purposedly confused. I intended that a gap from the near and far should be broken and the central and peripheral objects should have equal significance to form an organic relationships of contradiction.

Various objects in painting are extracted from drawings constantly collected in everyday life and of course it is based on personal experiences. The drawings had gone through a series of reconstruction after I observed things. It is inevitably accompanied by discrepancy resulted from materializing the abstract world in my mind. Letting you have question about essence of reality, I hope that you could focus on the way I see things.

There are various images discovered from daily life and those of which the meaning is untraceable. They are mixed together, having various relationships in every direction, become subjects of each event. Various and different events are ongoing everywhere.

From the whole structural images to a very tiny touch of brush that can not be seen at a look, my works have various layers of the macro and micro, the concrete and abstract, images and materials.

So what meanings can be found with these diverse layers? What can we see and remember from the vast pool of images, events, relationships overflowing in every directions? What shall we construct meanings of our own with?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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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V

이세준  Lee Sejun  李世準  1984

학력

2013 홍익대학교 일반대학원 회화전공 졸업

2011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전공 졸업


개인전

2020

「스페이스 오페라 Space Opera」KSD 갤러리, 서울, 한국 07.01~08.23

2019

「표면의 풍경」, 갤러리 아리오소, 울산, 한국 09.17 ~ 09.30

「세계관」, Space Willing N Dealing, 서울, 한국 05.09 ~ 06.09

2016

「포락지」, 케이크 갤러리, 서울, 한국 09.06 ~ 09.25

「늪과 숲」, 양주시립 창작스튜디오 777갤러리, 양주, 한국 09.10 ~ 09.24

2015

「무엇을 불태울 것인가」, Space Willing N Dealing, 서울, 한국 11.26 ~ 12.16

2013

「무한을 유한 속에 담는 방법」, 갤러리AG, 서울, 한국 12.18 ~ 2014. 1.29

2012

「지금, 이곳에서는 어떤 일들이」 키미아트 갤러리, 서울, 한국 10.12 ~ 10.26


주요 기획전, 프로젝트

2020

「OSS」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온라인), 서울, 한국 12.04~01.29

「월요살롱 이동혁x이세준」토탈미술관, 서울, 한국 10.19

「포스트 아포칼립스 Post Apocalypse」So, One, 서울, 한국 09.10~09.21

「Here We are」수창 청춘 멘숀, 대구, 한국 07.02~10.05

「신 소장품전 플러스」오산시립미술관, 오산, 한국 02.04 ~ 04.26

2019

「북구예술창작소 네트워크전」 울산문화예술회관, 울산, 한국 09.17 ~ 09.23

「Scenographic Imagination」 Beijing Commune, 북경, 중국 07.20 ~ 09.06

「ㅂ∩ㅇ project」 소금포 갤러리, 울산, 한국 07.08 ~ 07.13

2018

「The Gallerist」 WAP art space, 서울, 한국 12.14 ~ 12.18

「No life king」 아트스페이스 보안, 서울, 한국 09.18 ~ 09.25

2016

「트윈 픽스 Twin Peaks」 하이트 콜렉션, 서울, 한국 09.30 ~ 12.10

「乱城之魅」 树下画廊, 북경, 중국 06.03 ~ 06.09

「체크인」양주시립 미술창작스튜디오 777레지던스 , 양주, 한국 3.18 ~ 4.10

「서울 바벨」서울시립미술관 , 서울, 한국 1.19 ~ 4.5

2015

「굿-즈 Goods」세종문화회관 , 서울, 한국 10.14 ~ 10.18

「습한바지: Collerama Project」구탁소 , 서울, 한국 8.12 ~ 8.18

「Color On Canvas」미메시스 뮤지엄 , 파주, 한국 7.1 ~ 7.17

「만리제로 27길」만리동 예술인 협동조합 , 서울, 한국 5.30 ~ 6.7

「회화, 세상을 향한 모든 창들」BMOCA미술관 , 파주, 한국 4.4 ~ 6.21

「살찌는 전시 Get Fat Project」,공간 291, 서울, 한국 4.7 ~ 5.2

「비어있는 실험_오픈 스튜디오」777레지던스 , 양주, 한국 4.1 ~ 4.5

「열정을 위한 茶時」양주시립 장욱진 미술관 , 양주, 한국 1.26 ~ 4.12

「R.E.M」Twinpig」 서울, 한국 1.30 ~ 2.10

2014

「제4회 여름생색」 공아트스페이스 , 서울, 한국 7.9 ~ 7.22

「우문현답」쿤스트독 , 서울, 한국 4.4 ~ 4.17

「커먼센터 개관전_오늘의 살롱」 커먼센터 , 서울, 한국 3.27 ~ 5.18

「교차_시선」리각 미술관 , 천안, 한국 3.10 ~ 4.30

2013

「2013 동방의 요괴들」광주 스페이스 K , 광주, 한국 10.8 ~ 11.1

「New Romance」과천 스페이스 K , 과천, 한국 9.30 ~ 10.30

「Fearless」Able Fine art NY , New York, USA 7.10 ~ 7.30

「Parallel World_예술적 풍경」자하 미술관 , 서울, 한국 3.8 ~ 4.7

2012

「NewYork Art Show 2012」 SH gallery, New York, USA 11.14 ~ 2013.1.14

「Óvita_ 예술의 궤도」팔레 드 서울, 서울, 한국 7.18 ~ 7.23

「Painting is that_ KIMI for you 2012」키미아트 , 서울, 한국 7.6 ~ 8.29

「제2 회 서울디지털대학교 미술상」동덕아트 갤러리, 서울, 한국 2.15 ~ 2.21

「Accompany」인사갤러리, 서울, 한국 1.11 ~ 1.31

2011 「Class of 2011」갤러리 현대 강남스페이스, 서울, 한국 2.10 ~ 2.27


기타경력

2020

서울 시립 미술관 난지 미술창작스튜디오  14기 입주

2019

제1회 KSD 미술상 대상 수상

울산 북구 예술 창작소 6기 입주(장기)

2016

서울문화재단 예술작품지원기금 선정

Beijing B-Space residency 3기 입주(3개월)

2015

콜레라마 1집 정규 앨범 ‘억만광년’ 발매(8월)

2014

제 3회 가송 예술상 선정 작가

2013

양주 시립 미술창작 스튜디오 777 레지던스 1기 입주(장기)

Art in Culture 동방의 요괴들 Best10 선정

New York Art Show 최우수작가 수상

2012

아르코 미술관 신진작가 워크숍 수료

서울시립미술관 신진작가 지원프로그램 SeMA 제5기 선정

제 2회 서울디지털 대학교 미술상「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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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V

 Lee Sejun   1984


Education

2013

MFA, Graduate School, Department of Painting, Hongik University

2011

BFA, Graduated from the College of Fine Arts, Department of Painting, Hongik University


Solo Exhibitions

2020

「Space Opera」, KSD Gallery , Seoul, Korea 07.01 ~ 08.12

2019

「Landscape of Surface」, Gallery Arioso, Ulsan, Korea 09.17 ~ 09.30

「Weltanschauung」, Willing N Dealing_ Seoul, Korea 05.09 ~ 06.09

2016

「Submerged Land」, Cake Gallery_ Seoul, Korea 9.6 ~ 9.25

「Swamps and Forests」, Gallery777_ Yangju, Korea 9.10 ~ 9.25

2015

「What will be burn?」, Willing N Dealing_ Seoul, Korea 11.26 ~ 12.16

2013

「How to put infinity in a finite」Gallery AG_ Seoul 12.18 ~ 2014. 01.30

2012

「Something happens now」 Kimi Art Gallery _ Seoul 10.12 ~ 10.26


Selected Group Exhibitions and Project

2020

「OSS」 Nanji studio(online), Seoul, Korea  12.11~01.29

「Monday Salon  Lee Donghyuk xLee Sejun」Total museum, Seoul, Korea  10.19

「 Post Apocalypse」So, One, Seoul, Korea 09.10~09.21

2019

「Network Show of Bukgu Art residency」 Ulsan Culture and Art Center, Ulsan, Korea 09.17~09.23

「Scenographic Imagination」 Beijing Commune, Beijing, China 07.20 ~ 09.06

「ㅂ∩ㅇ project」 Sogumpo gallery, Ulsan, Korea 07.08 ~ 07.13

2018

「The Gallerist」 WAP art space, _ Seoul, Korea 12.14 ~ 12.18

「No life king」 Art space Boan, _ Seoul, Korea 09.18 ~ 09.25

2016

「Twin Peaks」 Hite Collection _ Seoul, Korea 9.30 ~ 12.10

「Seoul-Babel」 Seoul museum of art_ Seoul, Korea 1.19 ~ 4.5

2015

「Goods」 Sejong Center _ Seoul, Korea 10.14 ~ 10.18

「The Wet Pants: Collerama Project」 Gutakso _ Seoul, Korea 8.12 ~ 8.18

「Color On Canvas」 Mimesis Art Museum _ Paju, Korea 7.1 ~ 7.17

「Mallijae-ro 27-gil Opening Show」 Mallidong Artists Cooperative _ Seoul, Korea 5.30 ~ 6.7

「Paintings-all the windows to the world」 BMOCA Museum, _ Paju, Korea 4.4 ~ 6.21

「Get Fat Project」 Space 291 _ Seoul, Korea 4.7 ~ 5.2

「Unoccupied Experiment_ Open Studio of 777 Residence」 777 Art Studio, Artist’s Residency_ Yangju, Korea 4.1 ~ 4.5

「Art Motel No.777: Regeneration for Passion」 Chang Ucchin Museum of Art Yangju City_ Yangju, Korea 1.26 ~ 4.12

「R.E.M」 Twinpig _ Seoul, Korea 1.30 ~ 2.10

2014

「The 3rd Ghasong Art award 2014 Selected」 Gong Art Space _ Seoul, Korea 7.09 ~ 7.22

「A Wise Answer to a Silly Question」 Kunstdoc _ Seoul, Korea 4.04 ~ 4.17

「Today`s Salon_ Common center opening exhibition」 Common Center _ Seoul, Korea 3.27 ~ 5.18

「Cross_Line of sight」 Ligak Museum or Art _Cheonan, Korea 3.10 ~ 4.29

2013

「2013 dongbang yogoi」 Gwangju Space K _ Gwangju, Korea 10.08 ~ 11.01

「New Romance」 Gwacheon Space K _ Gwacheon, Korea 09.30 ~ 10.30

「Fearless」 Able Fine art NY _ New York, USA 07.10 ~ 07.30

「Parallel World_Artistic landscape」 Zaha Museum, Korea_ Seoul 03.08 ~ 04.07

2012

「NewYork Art Show 2012」 Shinhan gallery_ New York, USA 11.14 ~ 13.01.14

「Órbita; Orbit of art」 Palais de Seoul_ Seoul, Korea 07.18 ~ 07.23

「Painting is that part 1」 Kimi Art Gallery_ Seoul, Korea 07.06 ~ 08.29

「2nd Seoul Digital University Prize」 Dongduk Art Galleryl_ Seoul, Korea 02.15 ~ 02.21

「Accompany」Insa Gallery_ Seoul, Korea 01.11 ~ 01.31

2011

「Class of 2011」Gallery Hyundai Gangnam Space_ Seoul, Korea 02.10 ~ 02.27


Other Career

2020

SeMA Nanji Residency, Seoul, Korea

2019

The 1st KSD Art award  Grand Prize

Ulsan Bukgu Art residency program, Ulsan, Korea

2016

Baeksan Arts and Culture Foundation B-Space Beijing Residency program, Beijing, China

Seoul Foundation for Arts and Culture Arts support program (Solo Exhibition)

2015

Collerama 1st Album ‘Billions Light-year’ released

2014

The 3rd Ghasong Art award 2014 Selected Artists

2013

Yangju 777 Art Studio, Artist’s Residency, Yangju, Korea

Art in Culture Selected Artists Best10

NewYork Art Show "Best Artist" Award

2012

Arko Art Center Young Artist workshop

Seoul Museum of Art_ The 5th Young Artists Support Program ‘SeMA’ Selected Artists

The 2nd Seoul Digital University Prize "specialties" Aw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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